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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Oct 26. 2022

시간을 오롯이 보내는 법,
자기 호흡 존중하기

『4000주(올리버 버크먼)』을 읽고

외부의 욕망에서 비롯된 생산성의 늪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내게 꼭 맞는 속도로 하려는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뛰는 가슴을, 살아있는 감각을, 생의 환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수명을 80세 정도라고 하면 이를 주(week) 단위로 환산했을 때 4,000주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대략 2,000주가 남았다. 이것도 운이 좋을 경우에 한해서이겠지만...) '당신에게 4,000주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에서 키워드는 '생산성'과 '효율성,' 그리고 '결과의 통제'이다. 즉,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치의 결과를 달성하도록 상황을 통제하는 데 애쓰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평소 습관처럼 이야기하는 '시간을 쓴다'라는 표현에도 잘 드러나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책 『4000주』의 저자 올리버 버크먼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할 '자원'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말한다.


지난 봄부터 두 계절을 일터 밖에서 보내면서 나는 이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자고 다짐했다. 어느날부터는 심장 박동이 유난히 크게 뛰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미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난 것처럼 정신이 또랑또랑했다. 자연스럽게 한손을 뻗어 머리맡에 둔 책을 집어들고는 모로 누운 채 아침 독서를 시작했다. 그 자세로 두세 시간은 거뜬히 활자를 읽어내려갔다. 평소 같으면 누운 자세로는 30분을 넘기기가 어려웠지만, 어디선가 슈퍼 파워가 샘솟았다. 일을 그만 두었더니 비로소 내 안의 열정이 살아나는구나, '가슴 뛰는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생각했다.


틈 날 때마다 곁에 두었던 책을 펼쳐 읽었다. 그 시초가 되었던 책이 『슬기로운 뉴 로컬생활(김동복, 김선아, 박산솔, 배수용, 안지혜 저 외 5명)』이었다. 속초, 목포, 군산 등 다양한 지방도시에 터를 잡은 청년들이 지역 특색을 살린 사업 아이템으로 구 도심을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사례들을 모은 책이었다. 지방에는 그간 생각지 못했던 기회들이 있구나, 기회만큼 어려움도 있구나.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방 곳곳에서 자기만의 삶을 꾸려가는 청년들에게는 어떤 경건함 같은 게 느껴졌다. 수도권 과밀화, 지방 소멸과 같은 거대한 골리앗에 맞선 다윗 같았다. 나도 다윗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다윗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그제야 비로소 평소보다 심장이 두근대는 것이 열정이 아니라 압박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당장 수도권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잡을 거라고 선언했는데, 막상 일을 관두고나니 무엇부터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4000주』를 읽는 내내 묵은 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간의 고민을 말끔히 정리해주는 아이디어들에 밑줄을 쫙쫙 그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감탄을 쏟으며 저자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흠뻑 빠졌다. 이 책의 핵심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완전히 녹여내는 데 있다. 책이 조언하는 대로, 주어진 시간 동안 많은 페이지를 읽겠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문장들을 매개로 이어지는 저자의 생각에 빠져보았다. 저자의 메시지에 연관되어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잠시 책의 여백으로 시선을 옮긴 뒤 마음 속으로 생각을 전개시켰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왔다. 아무런 제약 없이 읽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면서 느낀 희열은 생각보다 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움 받을 용기』를 읽던 때가 떠올랐다. 서술 방식이 직관적이면서도 심층적인 생각을 건드리고, 단순해보이는 결론이지만 이에 이르는 과정이 깊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가장 큰 고민–시대의 고민이기도 한 ‘시간 관리’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속 시원하게 제시했다. 생산성과 효율성에 갇힌 시간 관리를 통해 이상적인 미래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덧없고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존재가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존재’라는 인식이 인간을 불안과 허무에서 어떻게 해방시키는지를 풀어냈다. 


그동안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빈 시간’을 새로움으로 채우고자 발버둥쳤다. 그리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 당한 것처럼 낙심했다. 그래서 모든 행위는 새롭고 창의적이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결과로 이어져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닥치는 대로 관심 가는 일을 찾아서 하기에 급급했다. 그 중에는 만족스러웠던 것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것도 있었으며, 생각보다 덜 만족스러웠지만 나쁜 것은 아니어서 억지로 좋은 의미를 찾아 덧붙이기에 급급했던 것들도 있었다. (마지막 사례의 경우 억지로 덧붙인 '좋은 의미'는 내가 진정으로 느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럴수록 하고 싶은 일은 늘어나는 반면 이를 전부 잘 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고, 그 간극에서 비롯된 좌절은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 헤맸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시작한 일들이 충분한 만족감을 줄 리 만무했다. 이렇게 내 삶은 조금씩, 무의미의 되먹임 안에 갇혀버렸다.


돌이켜보면, 직장 일이 번아웃될 만큼 힘들었던 것같지는 않다. 스스로를 혹사시킬 때도 많았지만 퇴근 후나 주말에 어느 정도의 여가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좀 더 부지런을 떨면 되는 일이었다. 좀 더 기운 내서 아침 일찍 혹은 퇴근 이후에 집 밖으로 나와 산책이나 조깅을 하고, TV를 없애고 책을 보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엇이 진짜 문제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많은 일들을 깨어있는 시간 동안 차질 없이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무엇 하나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직장에서는 한 가지 일을 할 때 다음 일을 어떻게 할지 걱정했고, 휴일에는 주어진 시간을 가장 의미 있는 일로, 그게 아니면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일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하든 가장 멋진 선택을 해야 한다는 무게감에 시작도 하기 전에 온몸이 얼어버리기 일쑤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런 현상이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 같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무한증식에 가까운 선택지 속에서 매순간 최고의 답을 고르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넷플릭스에 시청할 수 있는 콘텐츠의 수는 많지만 정작 볼 만한 작품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심리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한된 시간을 완벽하게 보낼 만큼 재미와 의미로 꽉꽉 채운 작품을 고르려다 보니 계속해서 선택을 미루게 되고, 이것이 볼거리가 없다는 왜곡된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콘텐츠를 핵심 위주로 축약 정리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책과 영화 등을 큐레이션하여 소개하는 콘텐츠에 의존하는 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정작 작품 자체는 즐기지 못한 채 말이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시간의 압박을 조장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몇 년 전 모로코 여행 중에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2박 3일간의 사하라 사막 투어 기간 동안 같은 방을 쓰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내면 깊은 곳의 단단한 무언가로부터 조용하고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힘이 있었다. 10 여명이 단체로 이동하는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의 일정을 나와 짝을 이루어 참여했지만, 혼자 있고 싶은 순간에는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어 그녀가 홀로 점심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그 아우라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앞이 훤히 트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자기 앞에 펼쳐진 벌판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다른 풍경으로 시선을 움직일 때도, 주문 메뉴를 확인하는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들어 말을 건넬 때도, 준비된 음식에 감사를 표할 때도, 포크를 들어 음식을 먹을 때도 서두르는 법이 없이 자신의 고결한 속도를 유지했다. 멋진 풍경을, 맛있는 음식을,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음미한 뒤 천천히 반응했다. 


투어를 마치고 그녀와 헤어진 뒤, 남은 일정 동안 그녀의 리듬을 내 몸에 입혀봤다. 걸음걸이와 시선의 움직임도, 말하는 속도도 3-4 템포씩 낮췄다. 그제야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새로운 자극을 감각하고 수용하여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뭘해도 굼뜨다는 지적에 마음 한 켠에는 조급증이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주변에 폐 끼치지 않기 위해, 욕 먹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도태되지 않기 위해 사회화란 명목하에 이런 성향을 억눌러왔다. 세상의 속도는 언제나 나의 속도보다 빨랐다. 특히, 오랜 기간 살아온 서울이란 도시는, 학교라는 일터는, ‘빨리빨리,’ ‘다이내믹’ 등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국경을 허물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는 느린 호흡의 소유자가 감당하기 버거울 때가 많았고, 주변에 맞추는 데 익숙해지다보니 내 호흡의 정체성조차 희미해지고말았다. 하지만 잠시나마 내 호흡에 맞춰 주변의 자극들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비로소 세계 안에 편안히 어우러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일상은 여행과 다르고, 사회적 자아는 개인적 자아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과 시간에서조차 타인이나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와 방식에 맞추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외부의 욕망에서 비롯된 생산성의 늪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내게 꼭 맞는 속도로 하려는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뛰는 가슴을, 살아있는 감각을, 생의 환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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