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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Mar 07. 2023

장미를 심는 마음으로

⟪오웰의 장미(리베카 솔닛)⟫을 읽고

서점에 진열된 책을 구경하다 한 가지 확실한 이유만 있어도 구매로 이어지는 편이다. 그런데 ⟪오웰의 장미⟫는 당장 떠오르는 이유만 해도 셋이나 떠오르는 탓에 값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의 저작들로 꾸준히 신뢰와 호감이 쌓인 ‘리베카 솔닛’이 저자라는 점이 첫 번째였고, 지난 학기에 학생들과 ⟪동물농장⟫으로 수업을 하면서 다시 보게 된 작가 ‘조지 오웰’의 이야기를 짚어간다는 점이 두 번째였다. 좋아하는 작가가 새롭게 호감을 갖게 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책의 카피 문구에 있었다.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이라니! 


기후위기, 전쟁, 식량위기, 대화와 소통의 부재, 관계 단절, 혐오 문화 등 요즘 시대를 ‘위기’라고 규정할 만한 근거는 차고 넘친다. 생각할수록 암울해지는 게 싫어 위기 자체를 외면하려는 이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불안 회피 성향 탓인지 상황 자체에 엮이지 않는 편을 택해왔다. 탄소 배출의 주범 중 하나인 육식을 끊고, 불편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끊고, 가치가 충돌하는 사람과 관계를 끊는 방식이었다. 도시를 끊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방식은 결국 나를 지치게 했다. 마음이 과로하자 쉽게 분노했고, 생기를 앗아가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필터가 필요함을 간절히 느꼈다. 부정형보다는 긍정형에, 절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워야 했다. 그것은 단연 ‘기쁨'이었다. ‘기쁨’은 웃음과 상상, 사랑과 관계, 무조건과 무경계, 이 모든 키워드를 아우를 수 있는 말이었다. 위기를 대하는 적절한 자세는 기쁨이지 않을까 하고 잠정 결론을 내렸지만… 도대체 어떻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곳에 도달하는 방법인데 막연한 상상만으로는 동력이 생기지 않았다. 가장 좋은 부팅법은 비슷한 상황을 멋지게 겪어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물론 현시대보다 더 암울하고 열악한 상황을 겪었다면 효과가 더 좋을 터였다.


조지 오웰은 그런 사례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그가 겪어낸 세상은 우리 시대보다 엄혹했다. 보어전쟁부터 스페인 내전, 1, 2차 세계대전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생애를 통틀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에서 치안경찰로 일하면서 바라본 제국주의 체제는 현지인을 상대로 폭력과 착취를 일삼았고, 언론인으로 영국 탄광을 취재하면서 목격한 광부들은 끔찍하도록 열악한 노동 여건에 무방비로 고통받고 있었다. 자본의 폐해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평등하고 인간적인 삶을 선사할 것만 같았던 사회주의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처절한 실패로 치닫는 것을 보았으니 절망은 더했을 것이다.

거대한 절망 앞에서 오웰이 기쁨으로 저항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솔닛은 오웰이 평생에 걸쳐 지녀온 기쁨과 희망을 ‘장미’라는 키워드를 통해 추출해 낸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뒤 아내와 함께 윌링턴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농가를 마련해 정착한다. 그리고 집 주변의 정원에 장미를 비롯한 나무들을 심고 가꾸며 그 경험들을 기록했다. 식물을 심고 가꾸는 행위는 그가 말년에 스코틀랜드의 고립된 해안 마을에 정착하여 자급자족에 가까운 삶을 살 때까지 이어졌다. ⟪1984⟫, ⟪동물농장⟫ 등 오웰의 저작들에 드러난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에 비하면 장미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것은 시시해 보인다. 하지만 ‘장미’와 ‘심는 행위’ 각각에 담긴 메타포를 떠올리면, 오웰에게 장미 심는 행위는 그가 종이 바깥에 써 내려간 정의이자 인생 내내 견지해 온 저항의 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장미'에 담긴 의미부터 살펴보자. 장미에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그 중심에는 ‘숭고함’이 있다. 여성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구호 ‘우리에게 빵을, 그리고 장미를’에서 장미는 먹고사니즘을 넘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한 존엄성을 의미한다. 먹고사는 절박함 앞에서도 인간은 주린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며, 사회 안에서 온전히 자기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장미는 무용해 보이지만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놓칠 수 없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할 때, 그의 인생의 특별한 순간을 축하하고 응원하고 싶을 때, 밥 한 끼 대신 장미꽃 한 다발을 선사하기도 한다. 오웰의 글에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자행되는 국가의 권력과 통제, 억압에 맞서 인간의 욕망과 자유, 예술과 사랑을 지켜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가득하다. 이러한 외침이 오웰의 장미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오웰이 장미 감상가에 그치지 않고 삶의 곳곳에 장미 묘목을 심는 실천가로서의 정체성을 병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종이에는 장미의 정신을, 정원에는 실제 장미를 심었다. 그리고 장미 심는 일을 두고 ‘가장 적은 비용으로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미 묘목을 심는 일은 당장 자신이 혜택을 보겠다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10년 뒤 후손들에게 멋진 장미 덩굴을 선물하고자 하는, 현재의 저항이자 미래를 향한 사랑에 가깝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되는 오웰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해 이미 곱게 피어난 장미를 보고 감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은 이기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장미를 심는 마음을 떠올리니, 장미를 보고 감탄하는 데 그쳤던 이기심을, 더 멋진 장미가 없다며 혹은 장미가 피어나기에는 척박하다며 한탄했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더 전인 아득한 옛날부터 책을 읽고 자판을 두드리는 이 순간까지도 수많은 존재들이 심어놓은 장미들 덕분에 숨 쉬듯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에 비해 나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심고 가꿔본 적 있었던가. 그저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간 이름 모를 이들이 남기고 간 유무형의 유산을 소비하는 데 치중하지는 않았나. 나에게 ‘장미’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장미를 보는 사람에서, 심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오웰의 장미로 돌아가면, 솔닛은 오웰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전일성(integrity)’이라는 용어로 정리한다. 책에 ‘전일성’이라는 우리말로 번역된 영단어 integrity의 뜻을 롱맨 영영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정직하고 확고한 태도(the quality of being honest and strong about what you believe to be right)”를 의미한다. 이는 믿음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태도로도 볼 수 있겠다. 그다음 의미로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통합된 상태(the state of being united as one complete thing)”라고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앎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솔닛은 (역자가 사용한 표현으로) ‘전일성’에 대해 ‘도덕적 일관성과 헌신’을 갖춘, 그 자체로 부서지거나 깨질 수 없는 완전한 것을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솔닛과 오웰이 공유하는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시대의 훌륭한 조각상처럼 시각적인 만족을 주는 조화미, 균형미와는 다르다. 오히려 겉모습은 어설프고 추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맥락들, 즉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솔닛은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흰 셔츠 차림으로 양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든 채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선 남자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의 행색은 위대한 저항에 걸맞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탱크 앞에 맨몸으로 맞서는 모습은 자유를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에 전율을 일으킨다. 탱크를 앞세운 권력의 무자비한 압제라는 맥락을 제거한 채 그의 행색만으로는 아름다움을 파악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의 앞에 대오를 갖춰 돌진해 오는 탱크와 무력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국가라는 거대한 맥락에서 남자를 바라볼 때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반대로 탱크를 막아선 남자와 대척점에 선 예로 제시된 것이 바로 상품으로 전락한 장미이다. 미국의 상점에 진열된 장미는 겉보기에는 화려하다. 그러나 이들이 콜럼비아의 대규모 농장(내지 공장)에서 ‘생산’되는 과정에 발생하는 심각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을 떠올린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피눈물로 피어난 장미를 보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 있을까.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산 및 유통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일상 뒤에 감춰진 나머지 개인적인 관심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멋들어진 상품 뒤에 숨은 추악한 진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알아차린다 해도 이미 상품 소비에 길들여진 나머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추악함을 발견했을 때 많은 이들이 감정적 거부 반응을 보인다. 다큐 영상을 통해 사탕수수 재배에 동원되는 수많은 이민 노동자들의 고통을 알게 되면 커피에 설탕 한 스푼 넣는 일이 예전보다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우리는 이미 설탕이 든 커피 상품을 사 먹기에 도덕적 책무를 느낄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커피 안에 설탕이 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이미 담긴 설탕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몇 차례 마시다가 어느 순간 불편한 진실에 무뎌진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삶에 필요한 대부분을 상품 소비로 해결하면서 우리는 최종 결과물만을 취할 뿐, 생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도 거대한 시스템 앞에 선 개인의 무력함을 들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물론 불매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안전을 나몰라라 하는 기업의 빵을 사 먹지 않고,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기업의 옷을 사지 않는 노력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우리 삶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주 안에서 호응을 얻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만약 특정 브랜드의 빵이 아니라 빵 자체를 불매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특정 브랜드의 설탕이 아니라 설탕 자체를 구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해도 불매운동이 확산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자기 마음에 생채기 내기 싫어 수많은 이들의 거대한 고통과 상처에 반쯤 눈 감은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 또한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이란 책을 통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이 어떻게 동물을 착취하여 우리의 밥상까지 오게 되는지를 알게 된 후부터는 비건으로 살고 있다. 그릇에 담긴 고기를 보면 동물들이 영문 모를 폭력과 착취로 고통받고 공포에 떨었을 게 떠올라 육식을 끊었다. 이런 선택을 존중하는 이들도 있지만, 가끔 “식물은 안 아파?”와 같은 모진 말을 던지거나,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니? 편하게 좀 살아.”처럼 걱정으로 위장한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나 한 사람이 육식을 끊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가까운 지인들조차 계속해서 육식 중심의 식단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왜 비건으로 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저 내 마음 편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한다. 하지만 내 마음 편하자는 이유가 되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저 나 하나에서 끝나고 말 일이라면 너무 게으르고 안일한 게 아닐까. 오웰은 장미를 심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론 엄청난 취재력과 필력으로 성실히 발표해 낸 글들과 그에 따른 뜨거운, 때로는 미지근한 응답들이 세상을 전과 조금은 다른 곳으로 바꾼다는 감각을 이미 선사했기에, 장미 심는 일의 가벼움(?)이 참을 만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궁금해진다. 사소해 보이는 장미 심기, 정원을 가꾸기를 오웰이 일평생 곁에 둔 이유는 뭘까. 이 하찮아 보이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결국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무지보다는, 아름다움을 취하는 행위의 미약함 앞에서 방황한다. 장미 묘목을 심는 것도,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 세우는 것도, 육식을 끊는 것도 아름다운 행위일 수 있지만, 당장 거둘 수 있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김이 빠진다. 어릴 적부터 누누이 들었던, ‘나 하나쯤이야'를 버리고 ‘나 하나라도'라는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그래서 뭐가 좋아지는데?’라는 날 선 반문으로 이어진다. 더군다나 ‘기후 위기'라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현실이 아름다움에 내재된 미래지향적 가치보다는 당장의 무용함에 무게를 실으며 조급증을 불러온다. 당장 눈에 띄는 결과를 보겠다는 마음이 이끄는 곳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상이 실현된 유토피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멋진 신세계⟫를 통해 보지 않았던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솔닛은 오웰식 기쁨을 ‘이상화되지 않은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현실을 통제하거나, 이상화된 현실에 가닿기 위해 인간적인 욕망과 불완전성을 외면하는 것 모두 오웰이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것들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미도 노동자들의 눈물로 피어났을 때 추악해지는 것처럼, 이상적으로 보였던 사회주의 체제도 체제 존속 내지 확산을 위해 현실 조작과 통제가 개입되자 대기근과 반대파 숙청으로 이어진 것처럼, 정의롭지 못한 과정은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설사 겉보기에 그럴듯하더라도, 아름다움의 본질은 이미 훼손되었다. 더 나아가 오웰은 간디의 비폭력 운동도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초월적인 힘에 기댄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여겼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욕망과 감정을 가두는 방식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자칫 인간성 자체의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웰에게 자연스러움을 넘어선 이상은 곧 예견된 억압과 폭력에 대한 경고와도 같았다. 겉보기에 완벽해도, 인간 본성의 한구석을 압박해서 얻어낸 것이라면 풍선 효과처럼 다른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결국 평형 상태에 도달하고 말 테니깐. 결국 오웰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대단해 보이는 것들 뒤에 숨은 폭력성을 견제해야 한다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만큼,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에 위배될 리 없다. 오웰이 계속해서 정원을 가꾸고 자연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내용을 그의 글에 녹여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인간이 발명한 것은 위대하고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 특히 자연이 빚어낸 것은 시시하게 여긴다. 자연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착취되어도 되며, 이를 통해 이룩한 인류의 문명이야말로 인간을 풍요롭게 해 준다는 왜곡된 믿음에 이르렀다. 그 선봉에 ‘자본주의’가 있다. 자본의 증식을 통한 성장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는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한 놀라운 시스템이었지만, 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지구생태계 전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지구 종말을 향해 폭주하는 열차에 오른 인류를 두고, 누군가는 열차 운행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고 다른 이는 열차를 아예 멈춰 세워야 한다고도 말한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웰은 말한다. 그 답은 인간다워야 한다고, 그리고 인간다움은 자연과 닮아 있다고! 그것은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 독창적이며, 약해 보이지만 무엇보다 단단한 힘이 있다고. 지금 당장 시선을 매료시키지 못하지만, 무한한 시간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고, 그 영롱한 빛을 무한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무한의 눈으로 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유한한 손과 발로 자기만의 빛을 빚어낼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장미를 심는 마음으로. 장미를 심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저항임에,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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