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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Mar 07. 2023

착하면 손해 본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사천의 선인(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읽고

이웃들로부터 ‘사천의 선인(人)’이라 불리는 셴테를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선’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 기준은 절대적인 걸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걸까.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에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난과 불신,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천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마지막 남은 선인이라 불리는 매춘부 셴테의 갈등과 고뇌가 담겨 있다. 그녀의 행동은 관습적인,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선함’에 부합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조건 없이 베풀고, 사랑하는 이가 조종사라는 잃어버린 꿈을 이루는 데 쓰이도록 자신의 가게를 위해 빌린 돈은 물론, 가게 전체마저 헐값에 매도하려고 한다. 심지어 그녀의 연인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사가 될 자금을 뜯어낼 속셈인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그를 지원한다.


셴테의 행동을 우리 시대의 눈으로 보면 전형적인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이다. 자신이 손해 보고 피해 입더라도 타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의 행위 동기가 낮은 자존감과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욕구라고 한다면, 셴테의 선행은 이와 다른 바탕에서 이루어진다. 셴테는 그저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며,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 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라고 말한다. 선행의 동기가 자신의 외부–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걱정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타인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 이르러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착하면서 저 자신에게도 착할 수는 없었다”라고 처절히 고백한다. 그녀가 살아가는 ‘사천'이란 곳은 가난과 범죄가 가득하고, 사람들 간에 신의가 없으며, 불의를 보고도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회피한다. 셴테는 신들로부터 받은 은화로 매입한 작은 담배가게가 몰염치한 이들로 인해 위기에 처하자, ‘슈이타’라는 사촌오빠로 위장하기 시작한다. 슈이타의 이름으로 가게에 머물던 사람들을 냉정하게 몰아내고, 손해 볼 뻔했던 자금을 회수한다. 셴테 앞에서는 자신들의 몰염치한 행동을 당연시했던 사람들도, 슈이타 앞에서는 큰 저항 없이 수긍한다. 그들에게 셴테는 막 대해도 되는 ‘친구’이지만, 슈이타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악인’인 것이다. 슈이타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셴테는 어떻게 되었을까. 며칠 만에 담배가게는 헐값에 팔리고 자신은 빚더미에 올랐겠지만, 신들의 선물을 받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크게 절망할 것도 없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남자로 위장해서까지 담배가게를 지키고 싶게 했을까?


처음에는 신들에게 받은 선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 것으로 보이지만, 극 후반부에서 결정적으로 미친 것은 뱃속의 아기였다. 아이는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보호자가 처한 상황과 성장 배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셴테 자신과 완전히 분리해 낼 수 없다. 그녀에게 가난에도 선행을 베푸는 것은 진심 어린 기쁨일 수 있으나, 태어날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불행이다. 자신의 기쁨을 아이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슈이타라는 분신을 만들어내면서까지 가난한 이웃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은 결국 이웃들에게, 그들과 살아가는 도시에 조금의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을 방증한다.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행위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거나 선행 바이러스 전파에 기여할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녀와 아이만 억울함을 감내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거라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셴테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만의 지속 가능한 선행 방식을 찾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슈이타’는 셴테가 생각하는 지속 가능한 선행 모델로 볼 수 있다. 그는 냉정하지만, 그렇다고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셴테가 빈자들에게 밥과 담배가게의 뒷방처럼 소소한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내주었다면, 슈이타는 담배공장을 차려 그들이 일하고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작업 환경이 열악했지만 이웃들은 ‘건강한 노동’으로 기본적인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매출이 올라 공장 확장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이웃들은 슈이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생과자를 훔쳐 경찰에 체포된 것도, 잘 곳을 잃은 것도, 비행사 남편 때문에 빚을 갚지 못한 것도 모두 슈이타 탓으로 몰고 간다. 슈이타의 행동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나, 이웃들은 그가 부당하다고 느낀다. 사천의 현실을 고려하면 슈이타의 행동은 지속 가능한 선행일 수 있으나, 정작 그 수혜자들은 조건부로 주어지는 것들을 선행으로 여기지 않고 셴테를 찾는다. 결국 셴테의 방식도, 슈이타의 방식도 사천에서는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브레히트는 선택을 독자와 관객에게 맡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셴테가 답답하면서도 그녀의 행동이 아름다운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셴테의 선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고 있고, 조건이 없으며, 희생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점이 자유로운 인간이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심리학자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에서 구하기보다 공동체를 향한 공헌에서 발견하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 그것이 나의 가치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셴테의 선행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과제분리',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타인의 일을 분리하는 것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셴테는 자신의 능력 범주를 넘어선 일을 슈이타에게 이양함으로써 그녀 나름의 과제분리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비자발적인 자기 분리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진정한 기쁨을 앗아가며, 그녀를 더 이상 자유롭지 않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어느 쪽도 완벽하지 못할 때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이 모여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가치가 된다. 이 모든 딜레마의 원인은 ‘신들의 기준’이지만, 그들은 법정에서 셴테의 고백을 듣자마자 지상에서 선인을 한 명이라도 발견했으니 그걸로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그녀를 찬양하고 떠난다. 무너지는 믿음 앞에 좌절하고 고뇌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지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이. 개개인이 소신껏 선택하고 결과를 감당하는 것이 최선인 걸까. 우리 시대에 개개인이 선택하는 ‘셴테’와 ‘슈이타’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그 비율이 우리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빚어내고 있을까.


‘착하다’라는 말과 함께 연상되는 표현들을 떠올려본다. 순진하다, 바보 같다, 세상물정 모른다, 잘 이용당한다 등등 죄다 부정적인 말들이 압도적이다. (나만 그런가…ㅠㅠ) 하지만 평생 어렵게 모은 돈을 더 좋은 곳에 쓰라고 기부하는 사람들, 자신의 재능을 돈벌이보다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위해 쓰는 사람들,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들 등 계산기보다 양심이 앞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하면서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위로와 희망도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악행들을 접하다 보면 쉬이 사그라지고 만다. 악행이 있다고 선행이 없는 게 아닌데도, 악행의 영향이 선행의 영향을 집어삼켜서 악행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끼고는 절망한다. 이기심보다 이타심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사실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진의가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조금이라도 이타성에 어긋나는 지점이 있으면 그의 행위 전체가 나쁜 것인 마냥 매도하기도 하고, 이런 식의 여론이 SNS에서 큰 파급력을 갖고 확산되면서 우리의 상황 인식을 실제보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조작하기도 한다. 선행에 관한 사례일수록 더 크게 이야기하고, 악행보다 선행의 잣대에 너그러워지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는 방법일 수 있다.


신들이 떠난 뒤, 셴테가 슈이타로 분장해 자신들을 속이고 조종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웃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미안해하면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보일까, 아니면 자신을 속인 셴테의 이중성을 비난하며 저주를 퍼부을까. 브레이트는 그 이후 상황을 관객들의 몫으로 넘기면서 반드시, 꼭, 좋은 결말이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여기서 각자가 그려내는 결말이 현실에서 개인의 선택으로 이어지고 사회의 윤리 의식이 될 것이다. 


나는 선함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을 지켜가고는 싶다. 좋은 마음으로 베풀었던 일이 억울한 결과로 돌아왔던 경험들을 짚어본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은 마음으로 베풀었던 걸까, 암묵적인 대가를 원했던 걸까. 그들의 상황을 듣자마자 놀라고 염려되는 마음이 앞섰지만,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선뜻 돕는 사람이라는 평판 내지 자기 만족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 행동에는 기쁨과 인정욕구가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면 그 안에 깃든 인정욕구만큼 실망도 느꼈다. 


나의 선행 동기에 기쁨과 인정욕구가 몇 대 몇 비율로 들어있는지를 따져보려 하니, 베푸는 행위에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려는 욕심을 알아차린다. 실망이 자주 반복될수록,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전보다 돕지 않는 쪽으로 머리를 굴릴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관계에 상처받은 내 곁을 묵묵히 지키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상황이 해결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자책하지 말라면서 위로를 건넨다. 지금 당장은, 내 곁의 ‘선인’들의 이야기를 나 자신에게 더욱 큰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다. 그 편이 나에게 더욱 좋은 결말을 만들어줄 것만 같은 예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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