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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Aug 30. 2023

[무소비 일기02] 소비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무소비 라이프를 실천한 한 달간, 나는 냉장고에 비축된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 먹었고, 부엌 선반 곳곳에 쌓여있던 커피와 차를 마셨으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엄밀히 말하면 과거에 소비한 것들이 현재의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의식적으로 소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또 다른 소비재들로 대체되어 존재조차 잊혔을 것들이다. 그리고는 이사할 때가 되면 한꺼번에 어떤 식으로든 처리되었겠지… 당장 먹고 싶은 것을 먹겠다며 사둔 음식을 쟁여놓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작업하겠다며 카페를 몇 군데씩 들르고, 새로 발견한 책을 읽고 싶다며 구매한 책을 책장에 쌓아놓는 등, 그동안 나는 이미 갖고 있는 것보다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기 일쑤였다. 새로움이 없는 삶은 지루했고,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소비했다. 머리로는 소비 자본주의를 경멸했지만, 현실에서는 소비 자본주의를 살아내고 있었다.


소비하지 않는 삶을 시작한 계기는 다소 거창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의 체질을 개선하고 싶었다. 일과 생활의 조화가 무너진 삶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적게 벌고 충만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더라도 그동안의 나는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짐을 등에 지고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 대고 있었다. 쓸데없는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짐을 줄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만 남겨야 했다. 단순히 불필요한 소비를 중단하는 것을 넘어서 매달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돈–특히 주거비와 식비–을 획기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벌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 그마저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어서 모은 돈도 넉넉하지 않다. (물론 상대적이겠지만, 통계자료에 나타난 비슷한 연령대의 평균 연소득에 비추면 그렇다.) 하지만 직업 특성상 지역 제한을 받지 않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 이상 수도권에서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며 끙끙 댈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무소비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주거비를 줄일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고민해 온 지역 도시로의 이주를 올해 안에 실행하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이어진 점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이로써 지출의 상당 비중을 차지하던 주거비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렇다면 식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식재료를 구입하지 않고서는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무소비보다는 지출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으로 잡았다. 냉장고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재료들을 발굴하여 우선 사용하고, 과일이나 채소와 같은 신선 제품은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여 요리해서 먹기로 했다. 직장 생활과 병행하기 어렵겠지만, 다행히(?) 이사 전까지 앞으로  몇 개월간 일을 쉴 예정이다. 소득이 없는 상황에 무소비 생활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유리한 조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비건이라는 점이다. 비거니즘을 실천하면서 식생활 면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메뉴가 조금 덜 다양해도 된다는 것이다. 다양하고 푸짐하게 먹고 싶은 욕구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소비 자본주의의 매체들이 쏟아내는 먹방 영상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자리 잡은 후천성임을 깨달았다. (물론 깨달음과 별개로 식성을 길들이는 일은 어려웠다. 특히 일터에서 스트레스가 누적될 때면 꼭 한 번씩 급발진하고, 그때마다 냉장고와 찬장에는 음식물이 쌓였다.) 개인마다 적절한 식문화가 있을 텐데, 나는 아침에 빵과 음료로 가볍게 한 끼를, 점심 겸 저녁으로 잘 차려진 한 끼를, 그 사이에 가벼운 간식이면 충분했다. 냉장고에 쟁여둔 식품들을 해결함과 동시에 직접 요리한 음식들로 식사하면 지출을 확 줄일 수 있다. 작년에 배운 비건 제빵, 제과 기술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무소비 지향적인 생활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서 지속 가능한 실천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던 걸 갑자기 멈추면 어디선가 불만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몇 년 전 비건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비건을 시작한다’는 표현에서도 느껴지다시피, 나는 ‘오늘부터 준비, 땅!’ 하며 비건 지향적인 삶에 다소 전투적으로 진입했다. 제주도 여행지에 도착해 첫 끼니를 기다리면서 읽은 책 ⟪아무튼, 비건(김한민)⟫이 발단이 되었다. 책의 중반부를 넘기면서 앞으로 육류를 섭취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제주 여행 첫날이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육류를 비롯한 동물 유래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았다. 


그 후로 쭉 고기를 먹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다. 이미 오래 고민한 문제였고, 주저하는 점들에 대해 명쾌한 설명도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세상이 짜놓은 판은 육류 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바쁜 업무로 요리할 힘이 없을 때면 외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식에는 대부분 고기나 육수가 사용되었고, 식당에 육수 대신 맹물(?)로 요리해 줄 수 있는지 여쭈었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그나마 몇 군데 안 되는 비건 음식점은 하나같이 비싸고, 평범한 한 끼라기보다는 어쩌다 먹을 수 있는 특별식에 가까웠다. 결국 샐러드와 콩류, 간단한 곡물빵과 과일 등으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몸에서 탈이 났다. 장거리 경주에서 전속력으로 달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후로는 외식이 필요할 때면 멸치육수와 조개류, 달걀, 가끔 새우 정도는 섭취하고 있다. 주말 동안 요리를 하든 장을 보든 일주일간 먹을 것들을 충분히 마련해서 주중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식사할 수 있는 루틴도 만들었다. 일상에 비거니즘을 들이면서, 어떤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허술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소비’는 ‘비거니즘’보다 제약이 큰 만큼 스스로 지속할 수 있는 범위를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프로젝트의 취지에 맞게 소비 외의 방식들을 강구하다 보니, 소비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했던 제품들이 생기면 고민이 깊어졌다. 무소비 프로젝트 기간에 하필이면 쓰고 있던 샴푸바가 떨어졌다. 수치상으로 0원에 가까운 돈을 써야 한다는 목표를 떠올리니 샴푸바의 가격도, 배송비도 아까웠다. 근처 마트에 가면 훨씬 저렴한 가격에 플라스틱통에 든 샴푸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유튜브를 보면서 직접 샴푸바를 만들어볼까? 하지만 제품의 성능이 떨어지면 머리를 감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겠지… 이미 니즈를 충족시키는 제품이 있는데도 ‘무소비’ 강령에 갇혀 있는 게 옳을까? 필요한 제품이라면 소비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현명하다는 기준은 뭘까?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면 현명한 걸까? 대량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와 일회용 포장재 쓰레기들은 어쩌고? 


머리 감는 일 하나에 인생을 건 것처럼 질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금은 낯선 경험과 지혜가 필요했다. 그러다 우연히 박정미 작가의 책 ⟪0원으로 사는 삶⟫을 알게 되었다. 무소비 라이프를 실천한 사람의 무용담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펼쳐 들었는데, 읽을수록 책 제목의 ‘0원’이 점차 ‘영원(eternity)’으로 변화하는 깊이가 느껴졌다. 이 책은 지금껏 내가 던진 질문들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주었다. ‘0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진 놀라운 이야기에서 나의 무소비 프로젝트가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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