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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eong Ellen Kwon Jun 27. 2023

얕게 깔려있는 오래된 좌절감

 “저는 사라예보가 가장 좋았어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국가의 수도인데, 저는 대개 그쪽 그러니까 발칸 반도에 위치한 국가들을 좋아해요. 예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있던 국가들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사라예보에서는 도시 전체에 안개처럼 얕게 깔려있는 오래된 좌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저는 그 분위기가 왠지 참 편안했어요. “


 네, 그 도시에선 얕게 깔려있는 오래된 좌절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무로 난방을 많이 해서 겨울이면 도시 여기저기에 덮인 뿌연 연기를, 어떤 카페에 들어가면 공간을 가득 메운 담배 연기를 볼 수도 있지만, 그와 다르게 이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느낄 수 있는 무언가예요. 덮인 것도, 가득 메우는 것도, 짙은 것도, 연기도 아니고 오히려 안개와 같아요. 바닥에 얕게 깔려 있어서 이른 아침 그 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발목 언저리가 청명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다 밤이 되면 그냥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제가 있던 겨울의 사라예보는 저녁 4시면 해가 져 어두웠고, 거리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시린 무언가에 잠긴 발걸음은 금새 무거워졌거든요. 그러면 작은 마켓에서 치킨 수프 가루를 사서 들어가곤 했어요. 거기에 치즈 한 조각을 넣어 끓이면 설렁탕 맛이 났어요.


 그 도시가, 그 시절이 참 좋았어요. 좋았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대책 없었고, 외로웠고, 위태로웠어요. 언제나 그랬으니 별 다를 것 없었을 수 있지만 어쩌면 그때는 좀 달랐어요. 나이를 좀 먹었다고 생각했고(막 서른이 되었고), 긴 여정을 통해  비로소 내 인생에서 해나갈 일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새 마음으로, 새 각오로 길을 다시 나섰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러나 사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는 (아마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여전히 내겐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사실 다시 한번 도망치기 시작했을 뿐이라는 것을.


 내 안에는 오래된 좌절감이 얕게, 그렇지만 온통 널리 자리하고 있었어요. 아침엔 괜찮아 보이다가도 밤이 되면 길 위에 주저앉고 마는.

 그래서 나는 그 도시가 그렇게도 좋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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