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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eong Ellen Kwon Jul 04. 2023

오래된 좌절감이 머물고 자라나 온 곳들

 나는 뿌리 내림을 피해 다녔다. 가장 싼 호스텔 도미토리였고, 호스텔도 없는 도시나 마을에선 흙냄새 나는 주저앉은 스펀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누였다. 터덜대며 먼지를 분사하게 마련인 천장형 선풍기가 날개가 안 보이도록 세게 잘 돌아가기라도 하면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 않을 땐 막연해졌지만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불평할 것도 투덜거릴 것도 없었다. 그저 매 순간을 견디는 수밖에. 그래도 13년 전 어느 날처럼, 느릿느릿 돌아가는 한 선풍기를 바라보다 문득 굉장히 중요한 것을 깨달은 적도 있었다.

 

 어느 도시에선 외출할 때마다 (일부러 더럽게 꾸민) 쓰레기통 아래 귀중품을 숨겨둬야 하는 곳에서 지냈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또 문 자물쇠가 뜯겨있는 것은 아닌가 두근거렸다. 노트북, 카메라 등 모든 짐을 털리고 침대에 누울 자신이 없어 의자 두 개를 붙여두고 길게 누워 보냈던 또 다른 마을의 고독한 방, 유난히 길고 무감각하던 밤들이 많았다.

 여러 고마운 이들의 소파에서도 새털같이 많은 밤을 보냈다. 불이 꺼진 어둠 속 홀로 누워 바라보던 천장들은 왜 이리도 하나같이 다 포근하고 따스했는지. 그 천장들이 지금까지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었으면, 가끔가다 떠올려 주었으면 참 좋겠다.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왠지 조금씩 더 쾌적한 환경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형편이 나아진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것을 감수해야 했다. 어느 도시에선 매일 아침 청소를 하고 침대보를 갈았다. 또 어느 도시에선 새벽마다 식사 준비를 돕고 오후에는 세탁기를 돌렸다. 때론 홍보 영상을 만들어 드렸고, 통역도 했다. 우연히 한인 회장님 눈에 들어 혼자 쓰는 기숙사 방을 얻고 삼시 세끼 한식을 먹게 되었을 땐 로또라도 당첨된 듯 황홀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1년을 있기로 약속했던 그곳에서 홈페이지를 제작해 드리고 각종 일을 도우며 지낸 지 3개월이 좀 넘어가면서부터는 여지없이 몸과 마음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한 곳에서 채 3개월을 머물지 못했다. 난 니제르강을 횡단하고 싶은 마음에 시들어가다 그곳을 떠났다.


 여행하며 밤을 지내온 방들이 몇 개나 될까. 몇백 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6~7년 전쯤부터는 한 도시나 마을에 전보다는 비교적 오래씩, 월 단위로 방을 구해 머물기 시작했는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복층의 작은 방을 구하고 위층에 누워 아래층과 창문을 내려다보며 맞이했던, 고요했던 첫날밤의 뿌듯함이 생생하다. 마침내 나의 공간이 생겼다는 아늑함. 그렇지만 이내, 짐을 싸 한 달간 지낸 텅 빈 방을 바라보다 문 밖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을 순간, 문 하나와 시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공간, 이 시간과 다시 낯선 사이가 될 순간이 생생히 떠올라 쓸쓸해졌더랬다.


 부다페스트는 8월이었고 매우 더웠다. 온실 같던 방에는 선풍기가 하나 있었지만 더위를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고 열린 창으로 바람 한 점이라도 들어오는 순간에만 잠깐씩 행복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름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대 같은 비가 몇 시간 동안 내렸고, 더위가 있던 자리를 물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온통 채웠다.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어쩌면 내가 늘 꿈꿔온 거대한 이상이나 성취가 아닐지도. 행복에 겨워 나는 카메라를 들었고 한 시간 만에 작은 영상을 하나 만들었는데 더위에 녹아가던 것도, 그날 행복했던 것도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영상에는 옆 방을 쓰던 튀니지 유학생이 방에서 뛰쳐나와 싱글벙글 웃으며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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