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주인아주머니는 사흘 이내로는 꼭 세탁물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머니의 손가락이 천정 한쪽을 가리켰다.
“저게 다 찾아가지 않은 옷들이에요.”
언뜻 보기에도 적지 않은 수의 옷들이 천정을 꽉 채우고 있었다.
“버릴 수도 없고, 참.”
남색 양복, 분홍색 재킷, 아이보리색 바지... 다양한 옷들이 세탁소 비닐에 담긴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닐 끝에 매달린 수 십 개의 꼬리표가 세탁소 특유의 냄새로 찬 공기 속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세탁소에 와 따로 세탁을 맡길 정도이면 나름대로 그 옷들은 주인의 손길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서 저렇게 내버려지게 된 것일까. 그것도 깨끗하게 세탁된 채로. 그 사이에 필요 없는 옷이 된 걸까, 아니면 세탁비를 내고 찾아가기 어려워진 것일까. 옷을 보관할 공간이 갑자기 부족해졌을 수도 있겠지.
나는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을 떠올려본다. 버려진 옷들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잊혔다는 것은, 버려졌다는 것은, 어쨌거나 신이 나는 상황은 아니니까.
어느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건도, 사람도, 관계도.
‘그것 하나쯤’ 없어도 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도 당장 필요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한 것들을 자꾸만 소유하려 든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것을 소유한 그 이후를 그려본다.
계절이 바뀌면 세탁소에 맡겨 세탁을 하고, 부지런히 먼지를 닦아줄 수 있을까, 잊지 않고 관리해줘야 할 부분을 챙길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 할 만한 물건인지를 생각해 보다 보면 그것을 나의 삶 속으로 들여야 할지 말지에 대한 분별이 생겨나곤 한다.
삶에 있어 사람과의 만남은 더욱 그렇다. ‘그 사람 하나쯤 없어도 돼’라는 생각은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그 말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을 포함해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에도 그것을 돌볼 책임이 생기는 것이라면, 사람과의 관계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의 ‘이후’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관계에는 그 무게와 상관없이 어떤 약속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함께 생겨난다고 믿는다. 가능한 한 그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그 관계를 내 삶에 조심스럽게 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특별함이 쌓이게 하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의 시간과 경험치 인지도 모른다.
손님이 찾아가지 않는 옷을 버릴 수도 없다는 아주머니의 말. 언제 손님이 갑자기 찾아와 자기 옷을 찾아가겠다고 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의 옷을 아주머니가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옷을 계속 사용하건, 버리건, 그 결정은 주인의 손으로 행해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한 타당하기 때문이다.
소유도,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작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정리 또한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주인들일 것이다.
세탁소의 흔들리는 꼬리표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가진 것들, 삶에 들인 사람들, 그중 무엇이, 또는 누군가 저렇게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삶에 자리했던 소중한 무언가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버려둔 채 살아오고 있지는 아닐까.
초여름 밤, 불 꺼진 세탁소 안에 주인 잃은 이름들이 가만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