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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Jun 16. 2017

밝은 하늘색, 모자 하나로부터

삶에 있어 변화의 계기가 너무나 절박할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비슷비슷한 생활에 지루함이 짙어질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삶의 새로운 요소들은 점점 줄어들고 거울 속의 내 모습도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간다고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때로 변화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자 하나를 새로 산다던가 하는 것.  

  

그것은 특별할 것 없는 모자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볼 때부터 그 모자는 내 눈길을 끌었다. 넓고 둥근 챙이 크게 드리워진, 밝은 하늘색의 면으로 만들어진 모자. 윗부분이 뚫려 있어 시원해 보였고 여밈이 고리로 되어 있어 조절도 가능했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박음질이 깨끗하게 잘 되어 있어 야무진 느낌을 주었다. 챙 끝에 와이어가 들어가 있어 형태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모자를 사러 간 길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 모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한참을 눈으로만 그 모자를 살펴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런 모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사기로 결정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이 모자를 쓰고 어디를 가는 거야?” 나는 대답했다. “그건, 음…, 글쎄.”

명확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의 내 생활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며칠간 나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은 채 집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밖에 나간다 하더라도 별 치장 없이 간단히 옷을 입은 채 맨 얼굴로 집 근처에 다녀올 뿐이었다. 5월의 햇살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처럼 깨끗하고 눈부셨지만 이상하게도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모자를 산 것은 어느 밤, 열 시가 지난 늦은 때였다. 아주 오랜만에 차를 타고 나간 외출 길, 쇼핑백에 모자가 들린 채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모자 하나였지만 늘 비슷하던 눈앞의 풍경이 조금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사 두었던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좋아 보였다. 그 전까지의 날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내 마음속의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씻고, 다림질을 했다. 어제까지 자주 입던 옷들을 이것저것 만져 보다가 옷가지들을 좀 다시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라진 생활에 맞추어서, 지금의 나에게 편안히 어울리면서도 산뜻한 느낌의 옷들을. 나는 새로 다림질한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자주 그랬듯이 좋아하는 책을 몇 권 챙기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넣었다. 아침이었고, 아주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커피 향이 그리웠다. 무언가의 향기를 강렬하게 그리워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챙겨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오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은 계속되고, 많은 것은 변화해 갈 것이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현관에서 나오는 길, 나는 어제 사온 새 모자를 썼다. 나는 생각했다. 얼굴에 기분 좋은 그늘을 드리우고, 햇빛 속으로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바람이 상쾌했다.



text and image by 엘렌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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