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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Jul 04. 2019

연한 마음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영화 <그녀>(2013)에 대한 노트들 #2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한 장면이다.


부드러운 컬러와 영상미로 넘쳐나는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그렇게 유쾌한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내가 이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오도르가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캐서린을 마주하는 장면. 그는 여기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한다.


이 장면은 영화 <그녀>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테오도르와 살아있는 인간의 장면이기에 특별하다. 파스텔톤의 투명한 화면 속에서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감정의 감미로움과 따뜻함을 느끼지만, 똑같은 햇살 아래에서 캐서린은 테오도르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슬픔에 빠지며, 화를 내며 날카로운 말을 쏟아낸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그렇지 않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어루만져주었던 때. 영화의 촉촉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그와 헤어지고 싶어 하는 지금의 캐서린이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울퉁불퉁해진다. 부드럽기만 한 색조는 현실의 세계가 갖는 스펙트럼을 모두 담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해서 어색하다. 그러나 이 삐끗거리는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현실'이 테오도르의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때이다. 테오도르가 살고 있는 세계와 테오도르가 살기를 희망하는 세계에는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영화 <그녀>에서 느껴지는 어떤 깊은 슬픔 같은 것은, 이 순간들, 우리 삶에 존재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순간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있다. 그것은 '예쁜 색'의 필터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분명히 존재하는 비극적 순간들이다.



OS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테오도르는 한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캐서린을 만나 그녀가 기다리던 이혼 서류에 사인을 했다. 사만다로부터 느꼈던 감정들은 캐서린으로 그를 이끌었다. 사만다와 그의 관계를 경시할 수 없는 것은, 그 관계로부터 테오도르가 삶 속으로 한 발 더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캐서린의 세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는 그녀를 마주하고 그녀가 기다리던 이혼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동안 그는 두려웠다. 사인을 마치고 나면, 그녀와의 관계는 이제 정말 끝이니까 그랬던 것 아닐까. 이혼을 미루는 것이 캐서린의 마음을 그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 하더라도, 그의 대답은 미뤄지기만 했었다.


어느 날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본다. 내가 처음 마음을 빼앗겼던 그 사람은 이제 거기에 없다. 부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와 그, 나와 그녀 사이에 존재한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선택해야 한다. 관계의 끝은 누가 먼저 이별을 말하는지, 누가 눈물을 흘렸는지와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무언가, 의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인정하게 된 쪽, 그 사람이 관계의 눈을 확실히 감겨 준다.


살아있는 사람과 사랑한다는 것,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나로서는 '살아있다'는 상태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상대를 고정시키지 않는 것,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의 자유도 허용한다. 더 이상 사랑하기 어렵다면, 나에게는 관계에의 의지만큼 떠날 자유도 있다.


테오도르는 결국 현실 속의 관계로 옮겨 온다. 그의 삶은 미니멀한 디자인의 가구와 멋진 물건들, 일상적인 나날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감정이 깃들지 않은 물건들과 관계들이란 배터리가 다 된 시계와도 비슷하다. 보기에 멋져 보이지만 어디서도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해 주지 않는다. 지금이 몇 시인지, 그래서 내가 지금 내 인생의 어디쯤 와 있는지 알고 싶어도, 그 값비싼 시계는 멈춰 있을 뿐이다.


테오도르는 매일 고객들을 위한 '가상의 편지'를 써 왔다. 가상의 것이 아닌, 진짜 자신의 편지를 쓰는 것은 사만다와도 헤어진 후 영화가 거의 끝나기 전, 캐서린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이다. 테오도르에게 캐서린과의 관계는 너무나 큰 상처였기에, 그는 그 상처를 마주할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말로 하는 것 이전에, 자신의 감정을 읽는 것 자체부터 불가능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 슬픔이 너무나 크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덩어리이기에.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현실로부터, 지금으로부터, 지금의 캐서린으로부터, 자꾸만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말한다. 말하는 데 성공한다. 캐서린에게 과거의 자신을 사과하고, 한편 언제나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는 네가 언제나 있고, 그리고 나는 그것에 감사해.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어디에 있건, 너에게 사랑을 보내. 너는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야." 캐서린은 알고 있었을까? 테오도르가 이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그 둘의 관계의 눈을 감겨 주었음을.


테오도르가, 과거의 연인에게 돌아가,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 결과를 수용하는 데에서,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갈, 삶을 만들어갈 구체적이고 단단한 바탕을 만든다.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표현하고 발화하며,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인정하며, 그는 미래로 나아갈 준비를 해 나간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행복, 따뜻함, 함께 있음에 대한 시작이 아닐까. 더 이상 그는 생각과 자기만의 추측, 착각, 관념으로만 가득 찬 진공 상태 속에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홀로 테라스에 선 테오도르의 모습. 그 어려운 과정을 용기 있게 치러낸 그가 아름다워 보인다. 마침내, 그는 자유롭다. 자신이 고정시킨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영화 <그녀>에 대해 쓰는 두 번째 글입니다. 첫 번째 글을 쓰면서, 추가로 글을 더하겠다고 했었는데 오랫동안 쓰지 못했네요. 그런데 그 글을 다시 읽어보니, 하고 싶은 말을 사실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은 노트처럼 이 글은 썼습니다. 무엇보다 2019년, 이 영화를 아직 기억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 반갑네요.


첫 번째 글은,

https://brunch.co.kr/@ellenwrites/39


text by 엘렌의 가을

image 영화 <그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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