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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Dec 09. 2017

영화 <그녀>(2013)에 대하여

#1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출처: 영화 <그녀>

<그녀>의 세계는 아마도 곧 우리에게 다가올,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형태의 옷을 입고 지금과 비슷한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흔히 미래를 다룰 때 볼 수 있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전망이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테크놀로지가 좀 더 심화된 다른 세계, 인공지능이나 가상현실과 같은 기술이 더욱 고도로 발달되고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온 세계를 보여줍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촬영 감독 호이터 반 호이터마(Hoyte van Hoytema)의 말에 따르면, 감독인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는 “촉각적이고 쾌적한(tactile and pleasant) 세계, 디스토피아와는 정 반대의 것”을 원했다고 하네요.      


저는 이 영화의 미술 연출이 무척 좋았습니다. 영화가 전해주는 이야기와 절묘하게 통하고, 때로 그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한편 충돌하며 효과를 만들어내는 지점들이 흥미로웠다고 할까요. 영화의 톤과 색감, 빛, 인물의 옷, 집, 집에 놓인 가구들, 직장 사무실의 반투명한 파티션, 도시의 환경, 전광판과 소품 등 다양한 시각적 요소들은 눈에 띄게 화려하지 않음에도 그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바렛(K. K. Barrett)은 영화를 제작하며 촬영감독 반 호이터마에게 사진가 가와우치 린코(Rinko Kawauchi)의 작품집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사진들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정물과 풍경, 장면을 투명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포착하고 있는데 <그녀>의 시각적 디자인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와우치 린코의 사진들. 출처: Collage of Rinko Kawauchi’s work ©v2 china/ Flickr



영화의 전체 톤은 대개 부드러운 색조로 보는 이에게 정서적 포근함을 느끼게 하지만, 사실상 이 세계는 주인공 테오도르(Theodore)에게 지독한 외로움을 전해 주는 세계입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었던 아내와는 결국 이혼하게 되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가상현실 게임을 하며 그 안의 캐릭터와 말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에 누워 상상의 관계를 나눌 웹상의 파트너를 찾았지만 그 속에 교감은 없습니다. “옆의 죽은 고양이로 나를 눌러줘”라는 파트너의 말을 들으며 그는 당황하지만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 앞에서 흥을 맞춰 연기할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연기하는 그의 목소리가 클로즈업된 당황한 얼굴의 표정과 대비되어 코믹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끝나자마자 통화는 뚝 끊깁니다. 딸깍, 하는 소리가 공허하게 밤공기를 울립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편리하게 가져가는 세계, 정보를 긁어모으듯이 감정을 따올 수 있는, 그러나 그래서 누군가는 상처받는, 이 세계의 밤입니다.        

  

컬러는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보입니다.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녀>에는 특히 다양한 색조의 붉은 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의 옷, 사만다(Samantha)의 기기도 붉은색입니다. 또한 핑크, 파랑, 노랑, 민트, 회색 등의 다양한 색들이 등장하는데 빨강, 파랑, 노랑 같은 원색이라 하더라도 그 톤이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색상들은 강렬하기보다는 은근하게 다가옵니다. 어딘지 우리 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그리움을 이끌어내는 색, 이 색조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쓸쓸함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한편 그 감정을 부드럽게 떠받쳐줍니다. 또한 색상들의 인상적인 등장은 인공지능 OS인 사만다가 세상을 처음 ‘보게’ 될 때의 감흥을 느끼게 합니다. 세상의 이 풍성함 앞에 사만다는 흥분합니다.     


출처: 영화 <그녀>


테오도르 또한 그녀와 함께 도시 속을 뛰어다니며, 매일 다니던 익숙한 길들이 새로운 생명력으로 태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은 컬러로 채워져 있지만 그것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고, 그래서 그 삶을 표현하고, 움직이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살아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세상을 보여주었다면,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다시 피어나는 감정을 선물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컬러로 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살아있는 감정이 필요함을, 그와 그녀가 함께 세상을 느끼는 장면들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얼굴에 일렁이는 따뜻한 햇살, 발에 느껴지는 모래의 촉감,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바람의 살랑거림.       


출처: 영화 <그녀>


곳곳에 색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부분이 많지만, 특히 영화의 후반부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테오도르가 마침내 사만다도 떠나보내고, 헤어진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 그는 흰색 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아내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렸던 시기를 함께 하고 서로의 성장을 지켜봐 온 존재. 그와 같은 존재가 떠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소중한 부분을 도려내 버리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다고 믿은 그녀가 이별을 고할 때, 그는 크게 상처 입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보냈던 메일에 오랜 시간 답장을 미룬 것 또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러고 싶지 않았던, 그의 마음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만다는 그가 그 상처를 마주하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상처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감정이 필요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상처, 그것이 주는 슬픔과 좌절감, 외로움과 절망감을 통과했을 때에야 상처는 비로소 감정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감정은 부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밝음과 어둠이, 기쁨과 슬픔이 붙어 다니며, 결국 그 모두를 통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을 연기하고 감정을 흉내 내며 남의 편지를 대신 써 주는데 익숙하던 테오도르가, 그래서 자신이 더 이상 새로운 감정을 느끼지 못할까 고민했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을 위한 편지를 씁니다.      


자신의 것이라 해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그 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가장 정확한 언어를 찾아내고, 표현하고, 게다가 그것을 전달하기까지 하는 데에는 완전히 새로운 마음과,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영화 마지막의 컬러, 이 흰색의 옷은, 그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기쁨과 슬픔을 넘어 감정의 살아있음에 그 자체로 감사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작.               





*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영화인 관계로, 몇 편에 나누어 글을 쓸 예정입니다.

* <그녀>라는 제목의 번역은 기존의 것을 따랐습니다. 제목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bitterSweet life + cinema

text by 엘렌의 가을

표지 이미지 출처: 영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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