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시소, 다정한 반말과 불쾌한 존댓말에 대하여
언젠가 영어 대사에 붙여진 한국어 자막에 반말과 존댓말이 임의로 구분되어 있어 강한 이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영화의 맥락상 두 사람의 관계는 위아래를 나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거나 친근한 선후배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짐작하자면, 번역자는 나이 차이를 근거로 해서 어투의 차이를 두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대화였음을 고려할 때, 안타깝게도, 성별을 근거로 그 둘의 차이를 설정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런 식인 것이다.
“여기 가 봤어요?”
“들어보긴 했는데, 아직.”
“그럼, 이번 주말에는 여기가 어때요?”
“괜찮아.”
“좋다는 거에요, 싫다는 거에요?”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했잖아.”
“주말에 대해서만은, 제발 좀 시원스럽게 대답해 줄 수 없나요?”
“좋아, 좋다고. 아주 좋아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여자는 존댓말을 쓰도록 번역해 놓았지만 사실 영어로는 수평적인 언어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번역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둘 사이의 언어에 있어 위-아래의 관계를 만들어 놓았다. 앞에서 말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별다른 의식 없이 무의식 중에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와 같은 번역은 개인 대 개인으로 사용되는 영어의 언어적 관계성과 우리말의 구조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번역을 통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고착된 사고방식을 목격하게 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번역으로 인해 인물의 성격과 관계가 왜곡된다는 데 있다. 한 인물이 어떤 어투를 가지고 있는지, 타인과 이야기할 때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는 그 사람의 특성을 표현적으로 드러내 준다. 또한 둘 이상의 사람들 간의 말하는 방식은 상호 간에 미묘하게 작동하는 정서적 거리와 긴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다정한 반말과 불쾌한 존댓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떤 자세로 앉아, 어떤 어법으로 대화를 나누는지는 그 둘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산책할 수 있는 관계인지, 어떤 옷을 입고 만날 수 있는 관계인지는 둘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시소, 그 속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게 된다.
때로, 아니 자주, 나는 주로 영어를 통해 이루어졌던, ‘나이 차이 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그리워하곤 한다. 서로 이름을 부르고 똑같은 말법으로 대화를 나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를 통과해 살아왔지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접점을 이룬 두 사람이 함께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서는 비슷한 나이 대의 친구들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특별한 기쁨이 생겨났다. 그것은, 그렇게 너그러이 불러도 된다면, 우정 같은 것 아니었을까. 깊은 존중의 마음이 깃든. 서로 다른 삶의 지점을 지나가고 있는 두 사람이 이루어내는, 독특한 템포와 다른 리듬이 거기에는 있었다. 진솔한 지혜와 깊은 위로가 있었다. 늙음이 위가 되고, 젊음이 아래가 되는 것이 아닌,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갖게 되는 나름의 희망과 고민이 신중하게 오고 갔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시간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