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옷장을 열었다가, 한동안 ‘음…’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문을 닫았다. 옷장을 정리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옷이 많은 것은 아니다. 옷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옷장 정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옷을 살 때 무척 신중한 편이고, 한번 옷을 사면 오래 입는 경향이 있어서, 몇 년이 된 옷들이 대부분이다. 버릴 옷이 많지는 않다. 다만 옷을 ‘순환시켜야 할’ 필요가 생겼다고나 할까. 옷장의 옷들을 몽땅 꺼내서 재분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옷장에 있던 옷들은 다시 세탁을 하고, 계절에 맞는 옷들을 눈에 잘 보이게 배치하고, 필요한 아이템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
물론 버릴 옷들도 있다. 정리할 옷들을 결정한다는 건, 정말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오래된 옷들이 많은 만큼 그 옷들에 너무 많은 기억이 묻어있다. 삶의 기념품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 옷은 다시 살 수 있지만,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추억들이 옷에 묻어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다 보면 손에 들고 있던 옷은 슬그머니 다시 옷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무척이나 그리운 옷도 있다. 겨울이 막 오려고 하는 요즘 입으면 좋을 것 같은, 살구 빛의 따뜻한 스웨터. 소중하게 생각하던 친구에게 스무 살 때 선물 받은 옷이었다. 그 옷은 그 친구가 생각하던 어떤 이상적인 가치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 친구가 내게 바랐던 것들, 세상에 바랐던 것들. 생각해 보면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받은 선물이었다. 그 친구가 그 스웨터를 보면서 나를 떠올렸고 그렇게 직접 내게 전해 주었다는 사실에 정말 기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평생 살구 빛 스웨터를 입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슷한 옷을 산 기억이 없다. 타인이 사 주는 선물에는 내 취향이 시도하지 않는 의외의 경험을 선사하는 기쁨도 그렇게 큰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이 돼서야 나는 삶이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을 그때까지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숱하게 그 말을 읽었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기까지 그 말은 내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삶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멈춰있고 고정시키려 할수록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행복했던 시절들을,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완결시키려 했던 삶의 결론들을 그대로 고정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시도하곤 했다.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나는 옷을 살 때 하나의 마음가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가 머물 수 있는 옷을 고른다는 것이다. 여전히 잘 만들어진 옷을 좋아하지만 예전처럼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지는 않는다. 비싸지만 이거 하나면 다른 옷은 필요 없을 거야, 같은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나는 믿게 된 것이다. 세상이 흘러가듯이, 옷장도 삶 위를 흘러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