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게 되는 밤이 있다.
주위는 컴컴하고 조용하다. 계단을 오가는 발자국 소리도, 낮에 들리던 아기의 울음소리도,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대낮의 시간 그대로이다. 시계는 조용히 초침을 움직인다. 서랍장 위에 올려 둔 컵들도, 책들도, 그대로 놓여있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에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우연한 배열이라 생각되었던 책등의 제목들이 뭔가 특별한 의미를 띤 것만 같다.
허겁지겁 아침에 입었던 옷들이 남의 옷처럼 보이기도 한다.
잘 알고 있다 믿었던 사람의 얼굴이 낯설게 보이고, 어딘가 빈틈이 있어 그곳으로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기도 하다.
거울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워진다. 그곳에 내가 모르는 다른 얼굴이 있을 것만 같아서.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켠다. 노란 불빛이 따뜻하게 실내를 비춘다.
어느 날의 밤들이 떠오른다.
언제까지나 흘러가지 않기를 바랐던 밤. 어딘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던 택시 안의 공기.
마음이 살짝 움직이고 오랜만의 설렘이 기억들을 들춘다.
오직 밤만이 할 수 있는 일. 오직 밤만이 전할 수 있는 부드러움.
선명한 햇빛은 명료하지만 달빛은 언제나 조금씩 감춘다.
반사해서 내딛는 빛. 한 발짝 은은하고, 그래서 두 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는 밤하늘의 달.
달은 어딘지 연한 종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얇고 부드러운, 반쯤 투명한 종이.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 밤의 고요를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왜인지 이 고요는 나의 것이 아니고 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양과, 지구와, 달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지금 이 밤 속에 있는 우리.
밤은 아무 근거도 이유도 묻지 않고, 내게 어떤 자연스런 믿음 같은 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지. 우리가 겪은 모든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은 단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 삶을 전체로서 바라봐 봐.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 모든 것을 삶을 통해 통과시키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기대해 봐.
아주 나중에, 아주 나중에,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
잊히지 않는 밤의 풍경들이 있다. 밤의 사려깊은 두 눈.
밤의 시간은 느슨하면서도 농밀하게, 벅차오르면서도 어딘가 슬프게, 잠에 다시 스르륵 들어 어느새 밝은 빛을 맞이하게, 그렇게 조용히 지나간다.
낮의 나는 밤의 나를 조금은 낯선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밤의 나 없이 낮의 나는 살아갈 수 없음을 또한 잘 알고 있다.
text by 엘렌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