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하며
한 해의 끝과 시작은 겨울로 이어져 있다. 달력은 바뀌지만 밤새 내리는 눈은 가뿐하게 날짜의 경계를 넘어간다. 매 해 어김없이 다가오는 첫눈은 이제 곧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리라는 계절의 손짓이지만 마음 한 편에 알 수 없는 포근함을 가져다준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이 눈을 볼 수 있으므로 또 한 해 살아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밀려오기도 한다.
추위를 무척 타는 체질이라 닥쳐올 겨울이 우선은 겁나지만, 이 가혹한 계절을 기대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장면들도 있다. 손바닥만 한 녹색 털모자를 쓰고 엄마 손을 잡은 꼬마 아이, 겨울에만 입을 수 있는 도톰한 스웨터와 코트, 털장갑, 빨간색 체크무늬, 카페라테의 우유 거품처럼 내려앉은 눈,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공터에서 가족들과 함께 했던 눈 놀이, 눈 내리던 그 도시와 쌓인 눈을 피하며 걷던 길들, 눈앞에 퍼져가는 입김과 유리창을 채운 뿌연 김, 물기,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면 어김없이 따뜻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
크리스마스는 겨울을 생각할 때 변함없이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다. 유치원 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아이들이 모인 방에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가 그 커다랗고 빨간 주머니에서 선물을 나누어줄 때, 내 순서를 기다리며 두근거리던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무슨 선물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두근두근함이 강렬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때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산타가 선물을 꺼내는 동안 이미 두 손이 앞으로 나와 있다. 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지만 산타가 왔다는 사실에 신이 났었나 보다. 지금 보니 사진 속 산타의 얼굴에 은색 수염이 붙여진 것이 보여 웃음이 난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반짝거리는 공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신비롭게 느낀 기억이 있다. 매끄러운 금빛 표면 위에 위아래가 구부러진 단발머리 내 얼굴이 보였다. 그 반사된 이미지는 신기하면서도 낯설고 뭔지 모를 옅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어떤 매혹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었다.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에게 세상은 때때로 낯설게 느껴졌지만 작고 귀여운 램프들을 반짝이며 공을 빛나게 하는 크리스마스트리는 그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징글벨, 징글벨, 세상 어딘가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숨어있을지도 몰라.
그때 나에게 세상은 미지의 것이었고 어른들의 세계는 멀기만 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트리 곁을 떠나 달려가는 내 얼굴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크리스마스트리의 반짝이는 공속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또 다른 나를 만나고 나온 길의 나는 그전보다 조금은 자라 있었던 것 같다.
캐럴이 울리던 겨울의 거리, 별 일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서둘러 걸어가는 사람들의 들뜬 기분이 전해져 오고 그건 그저, 그대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