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의 글 중에서
본격적으로 여름이 다가오면 티셔츠를 입은 채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가, 때로는 ‘I Love New York’이라고 쓰인 티셔츠가, 가끔은 해골 드로잉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눈앞을 지나간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모두 다 나름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덧입혀진다.
티셔츠라는 옷은, 그것을 입는 사람들도 다양하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지만 폭넓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찾는 옷이 티셔츠이다. 단순한 디자인은 비교적 다양한 체형의 사람들이 별 고민 없이 티셔츠를 입을 수 있게 만든다. 몸에 꼭 맞게 입을 수도 있고 아주 헐렁하고 여유 있게 입을 수도 있다. 바지나 치마 속에 끝을 넣어서 입기도 하고 밖으로 내놓아 편안하게 입을 수도 있다. 갑자기 공기가 추워지면 카디건을 위에 걸치기도 편하다. 그 위에 재킷을 입으면 캐주얼하면서도 차려입은 것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러면서도 티셔츠 전면의 디자인이 노출되어 그 표현적인 느낌을 잃지 않는다.
한편 오후에 글을 쓰며 밖을 내다보거나 산책을 나가면, 많은 엄마들이 티셔츠를 입고 있다. 바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그녀들의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이 잡혀 있거나, 막 필요한 물품들을 사 온 듯 커다란 동네 마트의 봉투가 들려져 있다. 그녀 옆의 아이들 역시 티셔츠를 입고 있다. 목에 둘러진 흰 가재 수건 끝이 삐죽 빠져나온 것이 귀엽다.
지나가는 한 엄마의 어깨가 축 처져있다. 티셔츠는 입은 이의 몸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 처진 어깨를 보며 세상의 엄마들을 떠올린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직업을 가진 이는 엄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살림을 하고 한 생명을 키우는, 끝없이 손이 가는 일들을 해 나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오후의 일과 속에 지나가 버린다. 겸손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때로 그것은 사회적 통념의 합리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사회적인 인정은 한없이 모자라다.
티셔츠는 수수해서 좋다. 티셔츠는 과시하지 않는다. 티셔츠를 입은 사람은 어느 누구 옆에서도 대체적으로 어울린다. 티셔츠를 입는 동안 우리는 명함에 찍힌 사회적 위치를 조금은 덜어내고 주말의 자신, 한때 소년이고 소녀였던 우리 자신을 얼핏, 보여주게 된다. 그 얼핏, 의 순간은 잘 말린 티셔츠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처럼 우리를 가볍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들이 때로 불러오는 무게, 깊은 곳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끌어내리려 하는, 우리를 고착시키려 하는 삶의 무거움을, 조금이나마 흩트려 주는 것만 같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티셔츠는 흔하지만 ‘제대로 만든 티셔츠’는 생각보다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 일상에 수많은 디테일들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미묘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같은 흰색의 면이라 해도 색상의 톤도 다양하며 재질도 각각이다. 목이 얼마나 파였는지, 탄력의 정도가 어떠한지, 그 형태가 둥글게 파였는지 아닌지, 다시 그 둥근 형태가 어느 정도로 조정되어 있는지, 그 세부적인 차이가 하나의 티셔츠를 다른 것으로 만든다. 원하는 두께와 촉감, 재질, 길이의 티셔츠를 찾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가장 심플한, 화이트 티셔츠일수록 그렇다. 그래서 괜찮은 티셔츠를 만나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상쾌하면서도 진지한, 흔치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text by 엘렌의 가을
image thanks to Janko Ferl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