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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Jun 01. 2017

오후의 고무나무

오후의 고무나무와 글쓰기에 대하여

어렸을 때 집 베란다에 고무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기억이 명료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오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윤기 나고 매끄러운 잎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제가 자라는 동안 그 고무나무도 쑥쑥 자라서 키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잎이 부러지거나 줄기가 갈라지면 찐득한 흰색 액체가 흘러나왔지요. 그게 고무라는 것을, 이름이 고무나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고무가 생긴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저는 그것을 그저 나무가 흘리는 피처럼 생각했지요. 틈이 갈라지면 피 대신 흰색 물을 흘리는 나무. 그것이 조금은 애틋하고 신비롭게 여겨졌어요. 지금까지도 그 고무나무가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그와 같은 느낌 때문인 것 같아요.

     

시원한 소나기가 지나간 후 햇살 좋은, 6월 첫날의 오후. 에세이를 쓰면서 그 고무나무가 떠올랐습니다. 

왜일까요. 글을 쓰는 일이 어딘지 그 고무나무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요.


에세이를 쓰는 일은 일상의 틈을 살짝 벌려주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틈을 살짝 벌리고 그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 성의를 가지고 그곳을 바라봐주지 않고는 글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한 주제가 있는 글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진부함을 피해야 한다는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므로 그때에도 특별한 성의를 가지고 대상과 경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의 있게 경험을 떠올리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 무엇보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데에 에세이의 느낌이 생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세이란 기사도, 보고서도, 논문도 아닙니다. 에세이란 어쩌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경험의 계기’ 같은 것을 만드는 촉발제인지도 모릅니다. 에세이는 우리 삶을 보다 천천히 둘러보게 해 줍니다. 타인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듭니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슨 경험을 했는지,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는 문장을 따라가며 읽습니다. 이때의 ‘읽는다’는 경험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작가가 가진 나름의 리듬과 문체, 그리고 속도에 맞추어 독자는 함께 세상을 경험해 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함께 춤을 추는 것일지도. 그리고 글의 발길을 따라 느껴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향기를, 세상의 분위기를, 세상의 빛을.

     

그러나 문장이 불러오는 것은 사실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이 ‘경험의 계기’가 된다는 의미는 그러한 것입니다. 빛이 좋은 오후에 쓰인 에세이를 읽으면서 읽는 이들은 언젠가 그들이 만났던 따뜻한 한낮의 느낌을 불러옵니다. '신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커피'를 읽는 이들은 상상으로나마 작가의 문장과 함께 맛봅니다. 문장은 읽는 이를 가상의 공간에 초대하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어떤 순간들을, 아름다운 순간들, 따뜻했던 순간들, 그리고 슬픔으로 헤매던 순간들을 불러들이게 합니다. 다만 그 공간에서 더 이상 그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에세이가, 에세이의 문장들이, 더 멀리 에세이를 쓴 누군가가 함께 있습니다. 


에세이를 쓸 때면, 어린 시절, 오후의 고무나무를 생각합니다. 그 사이에서 흐르던 흰색 액체가 전하던 신비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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