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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Jun 02. 2017

주말 밤,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

진실을 직면할 때 삶이 시작된다


<도쿄 기담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중에서도 좀 특별하다. 왠지 주말의 늦은 밤과 어울리는 책이다. 언제나 상상력이 돋보이는  글을 쓰는 하루키이지만, 이 소설집은 '기이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그중에서도 불가사의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합리적인 기승전결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런 일을 겪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묘한 느낌의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은 하루키의 책 중에서도 다른 책들에 비해 자주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런 것일까. 앞에서 말한 바로 그 비현실성, 불가사의한 내용들 때문일까? 아무튼간에 말이 안 되는 장난 같은 이야기라고 여겨지는 것인지도.


그러나 조금만 달리 보면 우리 삶에 신비란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작은 선택이 삶의 큰 흔들림을 만들기도 하고 우연한 선택이 큰길을 일구어 나가기도 한다. 성공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파국이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큰 시작이 되기도 한다.

     

'삶이란 그렇게 알 수 없기에 또 살아갈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상처받은 이에게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또 그렇기도 하니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외에 우리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방법이 또 달리 있을까. 마음이 힘들 때, 저절로 나는 이 책을 찾아 읽곤 했다. 현실적인 조언을 주는 책도 아니고 작은 우화들 같은 다섯 편의 소설인데도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 갈 길을 잃은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곤 했다.


그중 첫 번째 이야기인 <우연 여행자>. 이 이야기에는 몇 가지 우연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하루키가 직접 화자로 등장해, 자신이 겪은, 우연처럼 보이는 신기한 경험들을 말하면서 시작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토미 플래니건의 공연에 가 뭔가 아쉬움을 느끼던 하루키는 ‘바르바도스’와 ‘스타 크로스트 러버스’를 그가 연주해주길 바란다. 수많은 재즈 곡 중 이 두 곡을 연주할 가능성은 엄청나게 낮은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가 이 두 곡을 연달아 연주해 준 것이다. 재즈 곡의 숫자를 고려해 볼 때 특정한 두 곡을 연달아 연주하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이다’라고 하루키가 이 이야기를 해 주면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잠시 침묵하다가,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려 버린다고 한다. 그런 무관심에도 하루키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그저 어떤 종류의 신비함에 가슴이 뭉클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한 피아노 조율사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음악 대학에 들어가서야 자신이 호모 섹슈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그의 삶에서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알린 후 몇몇 친한 친구들을 잃고 부모님과도 사이가 틀어진다. 뿐만 아니라 누나의 결혼 문제와 겹치면서 십 년간 누나와 연락이 끊긴다. 하루키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명백한 사실을 장롱 깊숙이 감춰두고 사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주변에서는 기대했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의 경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음악적 귀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조율사로서 만족할만한 삶을 살아간다. 그의 일상 중 하나는 화요일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디킨즈의 <황폐한 집>을 읽는다. 그때 근처에 앉은 한 여성이 그에게 혹시 디킨즈를 읽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그녀 역시 같은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디킨즈의 유명작도 아닌 <황폐한 집>을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읽고 있다는 동질감에 그와 그녀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또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여성과 관계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미안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그가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그녀는 그를 만난 이후, 너무나 오랜만에, 일주일 동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고, 미용실에도 가고 다이어트도 하고 이탈리아제 속옷도 샀다고, 말한다. 남자와 그녀의 대화는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돈을 펑펑 쓰게 했군요, 내가.”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마 지금 내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런 것이라니, 무슨?”

  “내 감정을 뭔가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여자는 자신이 내일모레, 유방암 재검진을 앞두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결혼 후 오랜 시간을 아내로서,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의 근본을 흔들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 두려움을 버티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조언을 한다.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요.”


한편 남자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여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던 누나에게 전화를 건다. 누나의 귀에 있던 점과 비슷한 점이 여자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나는 어떻게 자신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는지 놀라워하며 내일 자신이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우연의 겹침에 대해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계기가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나는 그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걸 목도하고는, 아아,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참 신기하네,라고 화들짝 놀라죠. 사실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닌데. 나는 자꾸 그런 마음이 들어요.”

     

우연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을 신비롭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 절박하게 우연이라 불리는 운명이 우리를 이끌어 가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조율사의 마지막 말에서도 그와 같은 심정이 드러난다. 그 또한 자기 자신의 깊은 마음이 원하는 바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나와의 화해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 누나가 궁금했다는 것, 그것을 그는 의식상에서는 부인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각각 흩어져 있을 때에는 별 의미 없이 존재하는 사건과 현상들이 일련의 순서를 두고 차례대로 일어나면서 하나의 도형을 그릴 때가 있다. 화요일마다 찾던 카페, <황폐한 집>이라는 책, 그 책을 통해 만난 여성, 그녀의 아픔과 고백, 그 여성의 귀에 있던, 누나를 닮은 점. 남자는 그 우연들의 연쇄 속에서 누나와 다시 닿고 싶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누나에게 자신의 삶을 이해받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를 발견한 것이다. 그 욕구의 발견이 그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그는 어떤 계기가 없이는 차마 꺼내기 어려운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간다.


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마음의 어려움을 직면하면서.


이 소설집의 다른 이야기들에도 마음의 어려움에 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그들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보다는 인정하기 힘든 고통을 어떻게 직면하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다양한 사건과 우연들, 필연들이 작동하고 있다.


<도쿄 기담집>은 작가가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들을, 실제 그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갖고 - 앞에 말한 무심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 성의를 들여 ‘들려주는’ 기분이 든다. 마치 할머니가 손녀에게 오래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뜨개질을 하듯 기억을 엮고 엮어 말해주듯. 이 차가운 도시에서도 어딘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그들도 하루키처럼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을지도.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삶이라는 별자리의 좌표가 서서히 그 운행을 달리하고,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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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by 엘렌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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