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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Jun 05. 2017

일상의 기쁨과 슬픔

어느 나이가 되기 전에 일상을 즐기는 법을 익히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삶은 치명적으로 지루해지기 쉽다. 젊은 시절이라면 삶이 새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오래 같은 일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새로운 것들로 하루를 채우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면 세상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마술 같은 장치들이 어느 순간 그 눈속임을 드러내고 만다. 마음은 헛헛해진다.

     

아침이 오면 해가 뜨고 저녁이 오면 해가 진다. 이 당연하고도 엄연한 사실이 매일 반복된다. 일어나 씻고, 이를 닦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고, 식사를 한다.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씻고, 이를 닦고, 로션을 바르고, 잠자리에 든다. 비슷한 일과가 매일을 순환한다. 이런 일들이 일상을 채운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간이다.

     

권태는 매일의 삶 속 곳곳에 놓인 함정과 같다. 어떤 커다란 성취도, 그것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래서 당연한 삶의 일부분으로 포섭되면, 무감해진다. 마치 고양이나 강아지의 습성과도 같은 것일까. 멈춰 있는 장난감, 죽은 목표물은 더 이상 흥미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삶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을 잃은 시선은 아스팔트 위의 꽃잎처럼 뭉개져 숨이 죽어 있다. 일단 그저 버티고 살아가는 그 순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삶을 위협할 만큼 위태롭게 작용하기도 한다. 착실하게 늙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삶 속에서 자극이 되는 일을 만들어 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을 계속해 나가기는 어렵다. 끊임없이 자극의 정도를 높여간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가짓수를 늘려가는 즐거움, 양적인 자극이란 한 인간의 삶에서 물리적으로 또한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쉽지 않다. 또한 너무나 많은 자극은 정신을 현란하게 함으로써 반복과 권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삶의 반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그대로 있다. 그 바탕색은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변함없이, 빤히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다. '그래도 난 여기에 그대로 있어.'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와 같은 순간은 찾아온다. 누군가에게는 노년의 시기에, 어떤 이에게는 삶의 중요한 계기에,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떠밀려 내려온 것만 같은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 위로를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삶의 반복성 자체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선택해 태어난 것이 아니듯 해가 뜨고 지는 이 삶의 끝없는 순환을 받아들일 수밖에. 

     

그리고 이 순간, 일상을 즐기는 법을, 일상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을 맛보는 법을 익혀 온 삶이 빛을 발할 것이다.

모두가 스쳐 지나간 꽃에서 향긋한 즙을 발견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는 자기 삶의 거창함과 시시함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통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권태 속에서 신음하고 그 강을 건너는 법을 스스로 익힌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은, 결국 삶을 살아가고 느끼는 자기 자신을, 깨끗한 안테나로 만드는 일임을 깨달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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