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렌의 가을 Oct 27. 2017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뭔가가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 점점 그런 게 없어지니까. 그게, 힘들어.”

  “나이를 먹으니까, 시큰둥해지는 것도 있고.”

  “넌, 그런 게 있어? 네가 정말 좋아하는 거?”

  “말하자면…, 시키지 않아도 신나서 하는 그런 거?”  

  

카페 옆 자리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짧게 자른 커트 머리에 흰색 면 블라우스를 입고 검정색 진을 입은, 40대 초반 정도의 여자는 상큼해 보이는 노란 색 샌들을 신고 있다. 날씬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마른 그녀는 작은 얼굴에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 그 건너편에는 검정색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굵은 테 안경을 쓴 남자가 앉아 있다. 그는 그녀보다 다섯 살 정도 어린 후배로 보인다. 그는 그녀보다 많이 과묵하다.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는 그에게 그녀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둘 모두의 고민은 자신이 좋아서 스스로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을 하다가,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잠드는 생활, 이라고 둘은 평범한 하루를 설명했다. 남자는 그렇게 평생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여자도 끄덕이며 대답한다. 이런 게 사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지.  

  

그들의 대화는 그저 타인의 대화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이게 삶의 전부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찾아온다. 끝없는 반복. 삶에 무언가 특별한 것들이 반짝이리라 믿었던 한때의 믿음이 순진한 시절의 환상으로 느껴진다.


정도가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커다란 네트(net)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기도 하다. 텔레비전을 켜면 대부분의 채널은 둘 중 하나를 우리에게 권유한다. 이걸 사세요, 혹은 이걸 먹으세요. 경험은 경제적 대가와, 소비와 즉각적으로 연결된다. 세상은 끝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손짓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놀라고 또한 한 걸음 다가가며 우리 삶이 바뀌기를, 조금 더 특별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힘껏 걸어간 그 길이 결국 또 다른 범용함의 다른 버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망해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마음이 원해서 하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와 같은 교환 가치에서 벗어난 경험을 우리가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그와 같은 세상의 체계로부터 빠져 나와 조금은 자유롭게 해 주는 어떤 계기. 그 계기를 통해 반복된 일상의 구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것, 그 때 우리는 우리에게 욕구가 있고, 그 자율적 욕구가 삶에 자기다움의 색채를 더해줌을 실감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나 살아있구나……, 하는 작지만 강렬한 안도감을 얻어가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 손 안의 모래처럼 흩어져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형태가 부여된 시간이 그 안에 담김을 느낀다. 마치 레코드판처럼 그 안에는 스쳐 지나가지 않고 긁혀진, 힘을 주어 긁어낸, 경험과 느낌들, 생각들, 소리들이 담긴다. 어느 날 플레이어에 그 레코드를 플레이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그를 위해 글을 쓴다. 작지만 힘을 내어 속삭여 본다. 그래,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지. 이 생이라는 시스템을.




image and text by 엘렌의 가을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기쁨과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