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남과 답정녀가 상사일 때
얼마 전에 설치지 않겠다고 선언했건만, 역시 지 버릇 개 못 준다. (자꾸만 설치고 싶은 나님아, 진정)
결론부터 말하자면 설쳤다.
정리도 우선순위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시작~'이라고 상사가 말했다고 정말 다들 달려들어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순위와 중요도 순으로 정리한 후 시작하면 어떨까?"라고 샘플을 만들어서 상사에게 던졌고,
까였다.
팀장은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했다.
팀장: 지금 리스트가 30개밖에 없잖아요.
전부 다 살펴야 하는데.
나: 샘플로 넣어 놓은 데이터입니다.
팀장: 이 리스트는 내용이 안 맞는데요?
나:(아니 그건 샘플이라고 몇번 말...후우…)
그럼 어떤 방향을 원하세요?
팀장: ~~~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때만 해도 아직 '새' 팀장에 대한 적응이 덜 된 상태라 ‘수정하면 되지'라고 긍정 회로를 돌렸다. 어려운 사항은 아니었기에 며칠 후, 지시대로 수정해서 공유했다.
팀장: 오! 좋은데?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나: 그때 요청하신 대로 이거 빼고, 이래서~
팀장: 내가 언제?
나: (?????????????????????)
(참고로 회의록에 다 써 있음)
팀장: 그 방법은 안되지. 누가 그랬죠? 이유가 있을까요?
나: ???????????? (뭐지? 이젠 조금 무서울 지경...)
아찔한 정신을 부여잡고 물었다.
나: 그럼 예전 걸로 진행 할까요?
팀장: 아냐 아냐, 생각해봅시다.
1시간이 걸린 후 결론은 '생각해 봅시다.
근데 대체 내 제안은 까인 거야 아닌 거야?
혼란스러웠다.
연차가 쌓이며 확실히 여유로워졌다. 회사에서 일개 노동 도비의 의견이 별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아무리 불편하고 고생스러워도 사람들은 익숙한 방식을 선호하기에 새로운 의견이란 늘 밀당을 잘해야 한다. (너무 변화가 크지 않아야 하고, 너무 자주 바꾸면 안 됨)
게다가,
그렇기에 내 의견이 상사에 의해 묵살되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문제는 전혀 모르겠다, 이 '새' 팀장의 정체.
뭐가 됐든, 고!인지 스톱!인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그래서, 기여? 아니여? 말을 허라고!
동료들에게 알아보니 이 팀장은 '답이 없는 답정남'으로 유명했다.
과연, 1시간 회의 동안 팀장이 가장 많이 한 말은
"A안으로 갑시다. 아니다, B 안이 나으려나?"
"아, 근데.. B안으로 한다면 또 이런 게 걸리니까...
아니다! 그냥 A안으로 합시다."
회의 모습은 보통 이러했다.
10분 후...
나: 그럼 이건 A안으로 하겠습니다.
팀장: 아, 그런데 B 안이 효율적이긴 한데... (<< 내가 제안한 것)
10분 후...
나: 그럼 정리해서 곧 B안으로 작업하겠습니다.
팀장: 아, 그런데 A안으로 하는 게 꼼꼼하긴 한데..
55분 후 팀장이 한 말.
"내가 왜 그러냐면, 이게 청소와 같은 거라..
그래, 우리 청소라고 생각하고 고민해 봅시다."
이 시점에서 나는 빵 터졌다.
대체 이게 뭐람? 하는 생각에. (절대 청소회사 아님)
너무 웃겼다. 그랬더니 팀장도 날 따라 호탕하게 웃었다.
회의는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분위기만.
차라리 확고한 답정남이라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고, 이상한 거, 말도 안 되는 거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하면 되겠다. 그런데 '답이 없는 답정남'이라니. 이걸 어쩌면 좋지?
뭐, 이것도 적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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