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유독 남들 평가에 민감한 이유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에 의하면 한국인이 유독 불안에 취약하다고 한다.
바로 고립 불안이다.
Fear of negative evaluation
부정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
왜냐하면 그 무리에서 고립될 것 같은 불안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알면 뭐라 그러겠니?
내가 남들 보기 창피해서 얼굴을 들수가 없어.
너, 남들이 알면 욕해!
외로움에 관한 5-HTTLPR 유전자가 높다고 한다. 이게 높으면 집합주의로 간다. 즉, 외로움을 잘 느끼는데 전 세계적으로 탑은 한국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집단에 소속돼 있다고 외로움을 안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집단주의라면 집단에 속하면 외로움을 덜 느껴야 하는데 한국인들의 집단 내에서도 외로움을 비교적 쉽게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집단에 소속돼 있어도 ‘우리’라는
(공통된) 자아가 반드시 필요한 것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집단에서도 외로움을 느껴 '우리 엄마', '우리 가족'이라고 말하게 된 걸까?
언제부터 ‘우리 엄마’라는 말을 쓰게 되었을까?
하지만 들여다보면 오프라인 플랫폼만 옮겼을 뿐 온라인으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는 한국인들.
집순이 집돌이 들도 나가지만 않을 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다.
개인차는 존재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대부분 외로움을 잘 느낀다.
그러니 외로움을 이겨내게 해주는 타인의 존재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고,
고립에 대한 불안은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이 ‘부정적 평가’란 바로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닌 ‘남’이 내리는 평가라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내 기준이 없으니 남의 기준에 맞춰 선택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남을 따라 했으니 뭘 해도 만족도가 떨어지는 악순환의 반복.
내가 처한 상황과 기준은 계속해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주 고민해야 한다. (크게 X)
늘 끊임없이 기꺼이 자주 '나'의 선택과 기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자기 정의가 없기 때문!
우리는 자기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 나에게 운동화란? 나에게 자동차란?
위와 같은 고민을 자주 하고 내가 '누구'인지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면
남의 기준,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
'나'에게 필요한 자동차,
'내'가 좋아하는 운동화를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답이 있는 게 아니고 답일 필요도 없지만, 내 삶을 살아가는데 기준을 세우는 것이 남의 평가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을 멈추고 '고립 불안'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 "나에게 ____는 ____이다."를 매일 써보는 연습
업무가 바뀌든 직급/연차가 올라가든 상황이 바뀌면 또 기준이 바뀐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는 것, 상대방이 잘하는 것 등 자기 정의를 내려야 한다.
분명한 자기 정의 없이 업무 분담을 얘기하면
‘쟤가 나한테 일을 떠넘기면 어쩌지?’
‘나 혼자 일 독 박쓰는 거 아냐?’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맞던 틀리건 내가 보는 정의를 생산할 수 있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것은 특히 다른 사람과 늘 공존(비교) 해야 하는 바람에,
그래서 고립 불안이 높을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문제를 대처해 나갈 좋은 출발점이다.
내 기준에 대한 고민도 크기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그러면 나만의 이론이 계속 남의 이론과도 더해지고 떼어지고 다듬어져 정교화된 철학이 된다.
저 사람은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야
원책대로만 평생 살려고만 하면 고집불통이 된다. 그러므로 남의 기준과 내 기준 사이에서 계속 고민해야 한다.
오늘 적절했던 기준이 내일은 부적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이야기하는 것
우리는 고립 불안이 클수록 어떻게든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먼저 의견을 말해보고, 먼저 인사하는 등 사소한 이야기를 먼저 선점하는 것이 의외로 강력한 불안의 진정제가 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먼저 의견을 말했는데 정답이 아니다? 그러면 혼났던 부정적인 경험이 많아서 더 나중에 말하거나 침묵하려 하고 이것이 더 큰 고립 불안을 일으키는 악순환 고리 2가 되는 것 같다.)
먼저 웃고,
먼저 감탄사를 표현하고
먼저 의견을 내어보자.
돈을 더 벌라고, 집을 더 가지라고, 더 좋은 차를 몰라고 몰아붙이는 사회이지만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그 집안에서 어떻게 살지, 무슨 소망을 가져야 할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이다.
바로, 불안을 만들고 증폭시키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불안이 큰 사회의 특징 = 불안 완화제를 행복 촉진제로 착각하는 사회
불안 완화제: 그것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게 되는 것, 무언가 든 든 든 해지는 것
행복 촉진제: 그것이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해지는 것
불안이 없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불안 완화제는 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벨경제학상 수상 심리학자 대니얼 가너먼(Daniel Kahneman)
행복의 양은 연 소득 7만 500불이 기준(한화 약 8,000만 원 내외)이라고 정의함
8천만 원 이상일 때: 돈의 부족함으로 생기는 불행 >> 불안이 준다.
2천만 원 이하: 피해야 할 것을 제대로 피하지 못할 수 있다. >> 불행의 가능성이 크다.
돈은 불안 완화제는 될 수 있으나
결코 행복 촉진제는 될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데 돈에 집착하면 돈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고, 나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눈앞에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더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 자는 죽은 자이다.
불안을 불편하지만 함께할 동반자로 여기자.
그러므로 이 불안을 외면하거나 억누르려고만 하는 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다.
나의 불안을 감지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활기차고 (행복한) 삶을 불러온다.
이번 글은 아래 동영상을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