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봄 Feb 20. 2024

양보한 걸까? 밀린 걸까?

사람의 앉을 자리


"나 여사, 자기 나와바리(영향력이나 세력을 미치는 공간이나 영역을 속되게 이르는 말)는 그렇게 쉽게 함부로 양보하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돈도 빽도 없이 남편은 오직 자존심과 오기, 끈기로 직장에서 자기 자리 하나를 제법 탄탄하게 만들어왔다. 남편은 사주를 봐도 "콧잔등에 딱지 마를 날이 없구나. 날마다 죽창 들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를 하고 있으니 매일이 전쟁이고 피로다. 곁을 돌아볼 새도 없이."라고 한다.

그런 남편의 말이 수년이 지난 이제야 떠오르는 건? 어제오늘 뉴스에서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행보가 난리다. 누구는 분노와 자괴감에 탈탕을 택하기도 하고 누구는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당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그 뉴스를 보며 '정치인들은 자기한테 조금만 불리하면 죽기 살기로 생각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끝에 요즘 내 우울의 정체가 슬며시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요즘 내가 왜 자꾸 열등감 올라올 때, 우울해질 때 하는 짓을 하지? 왜 자꾸 명품 가방을 찾아보고 중고앱을 뒤지고 그러지?'싶었는데 뉴스를 보며 퍼뜩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자기 자리!

요즘 내 자리가 그렇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딱히 걸릴 게 그다지 없다. 그럼에도 뭔지 모르게 조금 허한 기분이랄까? 평소대로였다면 2월부터 시작해 바쁘다가 5월은 많이 바빠야 할 날이다. 하지만 나의 스케줄앱은 가족을 챙기는 것, 친정부모님의 병원 일정,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캘리그래피 수업, 성당 활동이 전부다. 한마디로 '나의 사용'을 통한 재생산이 없는 듯하다. 우울은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고, 열등감은 내가 부정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끓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과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왜 그렇게 그들과의 손을 놓았을까? 왜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을까?

여기서 '함께 하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함께 하지 못했을까?'라고 자연스레 손가락이 그렇게 써나가는 걸 보며 나는 또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다.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 성격상 못했을 것이다. 왜? 결국 내 표현력의 문제, 요구하기 어려워하고 불편해하고, 대화로 설득하기보다 설득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설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쥐뿔도 없으면서 진짜 없으면서 없는 티 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불편하고 싫어서. 조금만 영역에 대한 눈치보기, 심리적 다툼이 있을 것 같으면 마치 너그러운 자가 된 것 마냥 물러나고, 또 물러나고. 죽기 살기로 닦아놓고 '아, 그...래요?.. 그, 그럼.. 뭐...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개뿔!


남편 보고 느끼고 딸을 보며 늘 느끼는 게 '참 사람 안 변해! 천성이야, 저거 어쩔 수가 없어!'싶었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고 남의 눈의 티는 봐도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보고 살았다. 이게 나다. 20대 그토록 치열하게 살 때도 그랬고, 40대에 찬란하게 살 때도 그랬다. 30대엔 가족에 헌신하고, 50대에 이제 나는 어디에 불꽃을 박아야 할까... 허탈한 마음으로 전의를 상실한 지는 좀 된 것 같고 그럼에도 내 안에 이 허전함이 있는 이상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 더 태워야 할 열정이 잠재된 모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큼 깨달은 것에 박수! 내 안에 아직 열정이 있음을 확인한 것에 박수! 이런 게 나지만, 그럼에도 나이 먹으면서 욕심 덕지덕지인 것보다는 나으니 이제부터는 이런 내 성향을 바보 같다고 더는 비하하지 않아도 되니까 박수!

  




 


이전 08화 너의 위로와 돌봄이 간절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