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 결혼 안 하면 안 되겠니? 나이 서른에 그 식구 많은 집에 막내라니. 엄마도 그랬기 때문에 안다. 숟가락 하나 나눠가질 형편도 안될 거다. 차라리 있는 집의 장남이 낫지"
엄마가 사정하듯 내 결혼을 말렸다. 없어도 정말 없는 집의 막내인 울 엄마는 있어 보이는 허울뿐인 집의 장남에게로 시집와 층층이 시어른에 시누들까지, 도시락부터 살림에 제사에 농사일까지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맏딸인 나한테 만큼은 맏이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셨다. 주변에서 소개해준다고 하면 아무리 조건이 괜찮아도 장남이란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놓으셨다. 장남이란 것 빼고는 내가 들어도 조건이 좋았는데 차라리 말이나 말지 매번 거절했다는 통보만 하셨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하겠다고 인사시킨다 하니 엄마가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게다가 우리 남편은 나와 한살 차이지만 형제가 8남매였다. 그것도 시누만 다섯인 집의.
혼전 임신도 아닌데 나는 아니 우리는 서둘러 결혼 계획을 세웠고, 연애 6개월 만에 결혼 후 분가를 했다. 평생을 함께 하기엔 서로에 대한 탐색의 시간이 짧아도 너무 짧아서였을까? 결혼생활은 여러 가지로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기 무섭게 나를 보러 달려오던 남자는 사라지고, 걸어서 10분이면 오는 신혼집을 남편은 골목이라도 길이 막힌다며 날마다 후배, 친구들을 만나느라 귀가가 늦었다. 열 다섯 평 그 좁은 신혼집도 썰렁하게 느껴져 한쪽구석에기대앉아있자니 마치 낯선 세상에 나만 덩그러니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이 결혼 생활에 대한 내적 갈등과 변화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질 무렵 남편이 말했다.
"나는 애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우리가 아이를 안 갖겠다는 게 아니면 더 늦기 전에 하나만 있으면 좋겠어."
그간 남편이 '아이는 없어도 된다'라고 할 때마다 내심 서운하기도 했었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필요 없다고 하니 괜한 뿔뚝심이 서운함으로 올라오곤 했다. 우리 사이에 아이라는 매개체 그리고 연결고리.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계획 임신을 했고, 3개월 만에 아이가 찾아왔다.
열로 하신 시부모님이 기뻐하시기야 했지만 임신을 했다고 해서 축하 선물이나 좋은 과일, 그 어떤 축하의 이벤트가 없었다. 내 기억엔 그렇다. 여전히 술자리로 귀가가 늦는 남편에게 서운함만 쌓였을 뿐. 입덧도 결국 누울 자리를 보고 눕는다더니 나는 압력 밥솥의 밥냄새가 구수했고 그 어떤 음식에 대해서도 커다랗게 입덧이 올라오지 않았다. 굳이 말하라고 하면 멀미 증상? 그래서 자꾸 칼칼한 가락국수이나 칼칼한 국물이 당겼다. 그래도 친정 엄마한테 자꾸 찾아가게 되질 않았다. 왠지 반대했던 결혼을 해서 배는 불러가지고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도 없이 친정에 들락거리면 엄마가 반가워할 것 같지 않았다. 없는 집에 시집가더니 참 없어 보이는, 먹고 싶은 건 많은데 돈 없는 비참한 임신부 같은 기분? 그냥 내 기분이 그랬다. 엄마가 그런 내색을 한 것도 아닌데...그냥 남의 집 아이를 가진 채 배 부른 모습으로 친정집에 들어서는 게 나 혼자 괜히 머쓱한 느낌었다. 저녁 해거름에 나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양손에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배가 부른 채 언덕길을 꾸역꾸역 올라가던 나.
어느 날은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했다.
"나 딸기가 먹고 싶어. 겨울이라 비싸도 좀 사 와. 빨리 와."
tv에서나 보던 응석을 어색했지만 용기 내 해 봤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12시, 마트가 문 닫기 직전에 남편이 취한 채로 들고 온 폐기처분 직적의 딸기를 마주했다.
얼마 뒤 남편에게 이번엔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물론 빨리 들어오라는 말을 더 강조했다.
그날 퇴근 시간이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누가 현관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며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회사 후배가 햄버거를 들이미는 것이다.
"형수님, 햄버거 먹고 싶다고 하셔서요. 형님이랑 한 잔 하다가 잠깐 전해드리러 들렀어요."
기도 안 차고 어이도 없는 그 상황.
그 후 임신 9개월 정도 되었을까? 키 작은 나는 이미 7개월 차부터 만삭처럼 배가 불러 보였다. 아무튼 갑자기 불어난 체중에 무릎도 아픈 것 같고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친정의 도움을 받아 언덕배기 신혼집에서 평지의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였는데, 아파트 주변을 돌며 임신부들이 남편 손을 잡고 밤산책 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 부럽고.
그 밤에 혼자 운동삼아 나온 산책인지 답답한 속을 풀고 싶어 나온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혼자 처량하게 걷다가 들어갔는데 여전히 귀가하지 않고 술자리에서 전화를 받는 남편에게 분노가 폭풍우처럼 일었다. 집에서 보던 임신 대백과(?) 여하튼 그런 책을 갈기갈기 찢으며 분을 주체하지 못해 대성통곡을 했다. 거실은 찢어진잡지조각으로 가득했다. 보란 듯이 치우지 않았다. 얼마뒤 남편이 들어왔고, 그 상황을 보자마자 그 시절 혈기 왕성했던 남편은 '이게 뭐 하자는 거냐'며 한술 더 떠 우리의 결혼 액자 하나를 보란 듯이 깨부수는 게 아닌가.
그 사건이 계기였을까? 7,8년 차가 되도록 나는 남편에게 서운한 속내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른 채 살았다. 남편과 대화를 하고 제대로 소통하기 시작한 건 내가 우울증 치료로 심리상담을 받고 나서부터였다. 남편과 20년을 살고도 가장 기억에 남는 어두운 기억, 우울한 기억은 신혼 임신했던 시기다. 왜 이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 것일까?
"바로 그것이 상처의 본질이다.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상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고, 이제는 그만 생각해야 한다고 결심해도 자꾸 떠오르는 것이 상처다. 상처 난 감정은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바로 치유되지 않고 그만 덮어야겠다고 결심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관계의 언어> 문요한/더퀘스트
나는 진짜 딸기가, 햄버거 먹고 싶었던 거였을까? 당신과 '함께 먹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을까? 임신 대백과를 찢어버린 퍼포먼스의 의미는 분노였을까? 그 모든 게 다 '위로와 돌봄'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의 절규였다. 그때 나에게는 당신만이 필요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뒤뚱뒤뚱 배불뚝이가 된 내 곁을 안전하게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오십이 넘어가면 이제 이런 것도 훌훌 털어야 할 나이가 된 거겠지? 뇌 속의 단백질 쓰레기를 청소하듯 마음 안에 들러붙은 묵은 감정도 이렇게 한번 털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