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7)
머리를 말아 묶은 그 남자는 말 무늬의 조끼를 입고, 목에는 가벼워 보이는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저..."
말을 걸자, 그는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고 인사해주었다. 나를 살짝 위아래로 훑어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경계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는 내게 "여행객인가?"하고 묻더니, 뜬금없이 이 주변에 말이 많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말...?"
물론, 마구간이니까 말은 많은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는 나의 되물음에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래, 말! 이 필로네 초원에는 야생마가 많지. 나는 여기서 말과 함께 태어나고 자라서 승마에는 자신있어. "
갑자기 승마 이야기라니... 나는 말을 타 본 적이 있을까? 동물을 좋아하니까 말을 타 보긴 했을 것 같다.하지만 어떻게 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브린카라고 해. 승마 실력을 올리기 위해 내가 직접 고안한 경기가 있는데, 훈련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거야! 그리고 이 경기에서 나를 이길 만한 실력자는 거의 없을걸...? 어때, 내 기록에 도전해 보겠어?"
갑자기 기록에 도전하라니... 무슨 경기인데 그런가 싶어 더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브린카의 설명으로는 말을 타고 10개의 장애물을 넘는 것인데, 시간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장애물을 넘을 때는 나름의 요령이 있어서, 무작정 빨리 달린다고 장애물을 넘을 수 없다고 한다. 속도를 잘 조절하고, 장애물을 넘는 방향도 신경써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기록은 1분 15초이므로, 그 기록을 깬다면 보상을 준다고 했다.
말을 탈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도전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해보겠다 대답했다. 그러자 브린카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도전할 거면 우선은 말을 타고 와야지! 말을 타고 오면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 줘." 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일단은 말을 구해야겠구나 싶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 새 밤이 되었다. 전투의 긴장이 풀어지며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브린카 앞에는 커다란 요리 냄비가 있고, 따스한 장작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다. 불을 보니 배고파졌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면서 채집한 요리 재료들을 가지고 비상식량을 몇 개 만들었다. '하이랄초'와 '하이랄버섯'을 함께 넣어 '버섯쌈구이'를 요리하고, 여러가지 과일도 넣어 끓였더니 '과일전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 처음 보는 요리들이라 무슨 맛일까 기대가 되었다.
일단 따스한 국물이 좋을 것 같아 과일전골을 먹어보았다. 달콤한 과일주스에 과일 조각이 떠 있는 요리인데, 달달한 국물을 마시니 꽤 기분이 좋아졌다. 과일 조각은 푹 익어버려 물컹물컹했다. 대충 씹어 넘기고 뒤를 돌아 마구간 안을 보려는데, 자기 몸보다 더 큰 배낭을 맨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오우! 당신 처음 보는 얼굴이네용~ 처음 뵙겠습니당~! 나는 이 큰 장수풍뎅이 배낭이 트레이드 마크인 테리라고 합니당!"
테리는 이런 저런 물건을 배낭에 넣고 다니며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는 매우 숙달된 상인 같았다. 나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가판대를 머리 위에서 탁 꺼내 목에 걸고, 부지런히 물건의 먼지를 털며 바쁜 손놀림을 보여주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구경하고 싶어 물건을 보여달라고 하니 신나게 보여준다. 나무화살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곤충 외에 별 물건은 없었다. 곤충은 물약을 만들 수 있는 소재라고 하지만, 테리가 매긴 값은 기대보다 아주 비쌌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화살만 샀다.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묻길래, 가지고 있던 몬스터의 소재들을 몇 개 팔았다. 개별로는 몇 푼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전투를 되도록 피하고 다녔는데도 그 새 쌓인 보코블린의 이빨이나 뿔은 5개만 팔아도 40루피 정도이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고 생각한다.
테리와 거래를 마치고, 마구간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구간 뒤편에는 몇가지 농기구가 있었고, 소들이 한가로이 거닐며 풀을 뜯고 있었다. 밤이지만 달이 훤하게 비치고 온화한 바람이 살짝 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마구간 구석에서 개 한마리를 발견했다.
그 커다란 개는 덩치가 큰 것 치고는 싹싹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쳐다보자, 바로 나의 눈을 맞추어 바라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품속에서 사과를 몇 개 꺼냈다. 고기가 있으면 주고 싶었지만, 시작의 대지에서 나온 이후로 동물 사냥은 실패의 연속이라 고기가 없었다.
사과 3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먹으라 손짓을 보냈다. 처음에는 아무 반응도 없는 것 같았는데, 사과들을 빤히 보더니 이내 아삭아삭 먹어치웠다. 두개 째 먹고 나더니 매우 기쁜 듯, 팔짝팔짝 뛰며 꼬리를 흔든다. 개의 얼굴 주변에 즐거운 빛이 떠돌았다. 그 모습이 신기하여 개를 계속 바라보는데, 개는 고갯짓을 한 번 하더니 어디론가 스르륵 이동하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건가?'
확신할 수 없어서 개가 가는 쪽을 보았다. 개가 잠시 멈춰서서 나를 돌아본다. 오라는 뜻이 맞다 싶어 얼른 쫓아갔다. 개는 총총 가볍게 걷더니 마구간 한 구석의 덤불 앞에 앉았다. 나를 계속 바라보면서, 꼬리를 낮게 흔들었다.
'왜 여기에 앉은 거지?'
개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이쪽 구석에 앉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앉아 있는 자리 주변을 살펴보는데,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풀밭 바닥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구름이 지나가고 달빛이 더 밝아지자, 이끼가 낀 상자가 바닥에 묻혀 있는 것이 드러났다.
아! 그렇구나. 개는 먹을 것을 준 나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던 거다. 고마워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개를 숙이며 기분좋게 그르릉거리던 개는, 내가 상자를 바닥에서 꺼내기 위해 마그넷 캐치를 사용하자 놀라 달아나버렸다.
상자는 쉽게 바닥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열어보니 '보라 루피'가 들어 있었다. 보라 루피라면 50루피! 이것도 꽤 나쁘지 않네.
마구간을 돌아보다 텐트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을 마주쳤다. 그는 마구간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테리만큼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이곳은 말 관리와 숙박이 가능한 마구간입니다."
아...마구간은 말만 관리하는 곳은 아니구나... 여행자들이 묵을 수도 있는 곳이었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나의 이름을 물어본다.
"링크... 입니다."
내 이름이라 알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이름을 말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색하다 싶은데, 그는 장부를 쭈욱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저희 집에는 처음 오시는군요. 마구간 시스템은 알고 계신지요?"
"마구간 시스템요? 그게 ... 뭔가요? 가르쳐 주세요."
그는 장부를 탁 덮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구간은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대신 맡아 주고 관리를 해 주는 곳이며 안쪽에는 침대가 있어 숙박도 가능한 곳이다. 숙박을 하려면 마구간 텐트 안으로 들어와서 다른 카운터에 말을 걸면 가능하다고 했다. 하이랄 곳곳에는 마구간이 있는데, 이 곳에 말을 맡기면 다른 마구간에서도 자신의 말을 찾아 길을 떠날 수 있다고 한다. 엄청 편리하지 않냐면서, 다소 신나 보이는 마구간 주인은 내게 야생마 이야기를 꺼냈다.
"또 여행 도중 야생마를 보셨지요? 그 야생마를 잡아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십시오."
"야생마라면...."
"네! 링크님. 이 주변에도 야생마들이 있답니다. 초원에 보시면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말이 있는데, 그놈들이 모두 야생마지요. 야생마를 잡으면, 마구간에 자신의 말로 등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야생마는 어떻게 잡나요?"
나의 질문에 마구간 주인은 아주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야생마는 예민하므로 소리를 내면 달아나기 쉬우니, 말 주변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다가가야 한다. 가까이 갔을 때 기회를 보아 올라타면 말이 놀라서 펄쩍펄쩍 뛰는데, 이 때 말을 쓰다듬으면서 어느 정도 버티면 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잡아 마구간에 등록한다 해도 말을 타고 갈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도 일러 주었다. 야생마 특성상 사람에게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므로 말을 몰고 가더라도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야 할 길로 말이 들어서지 않을 때는 말을 잘 쓰다듬어주고, 너무 급하게 몰지 않아야 한다는 조언도 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마구간 안쪽에는 침대가 여러 개 놓인 숙박시설이 있었는데 그 곳에 누군가 잠들어 있기에 가 보았다. 키가 작고 나이가 들어보이는 여자가 누워 자고 있는데, 조금씩 잠꼬대를 했다.
별 말은 없기에 침대가 있는 곳을 나와 다른 쪽을 보았다. 침대 반대편에는 커다란 원형 탁자가 있고, 사람이 둘러 앉을 의자가 있는데 - 탁자 위에는 누가 보란 듯이 펼쳐진 책이 있었다. 책의 제목은 '세나의 뜬소문 Ex 중간 3호'.
'세나의 뜬소문...이라니, 책 제목이 뭐 이렇지...' 왠지 웃음이 나와서 책을 살펴보았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세나'라는 사람이고, 하이랄 전역에 떠도는 소문을 수집해서 기록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쓰인 글은 사투리로 쓰여 있어 읽기가 편하지만은 않았으나, 대략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발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3호라는 것을 보니 이미 여러 권이 나와 있는 것 같다. 세나가 수집한 소문 중 세번째 권에 쓰여진 것은 '고대 마구'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소문에 의하면 고대 마구를 구해서 말을 탈 때 사용하면 참 좋은데, 그 마구가 있는 위치는 어디더라... 라는 것이다.
"고대 마구는 억수로 편하다!
말의 능력을 촥 끌어내 주는 고삐하고, 말을 순식간에 불러내는 안장이라는데...
고삐는 하이랄 구릉의 남쪽, 동물이 모인다는 산의 벚나무 아래에...
안장은 말의 화신이 있는 신비한 샘에 각각 남겨져 있다는 소문이데이..."
알듯 말듯한 소문이었다. 말을 구하게 된다면 한번 구해볼만한 보물일지도 모르겠다. 말의 능력을 끌어내주는 고삐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고, 마구간이 아닌 곳에서도 말을 불러낼 수 있다면 편리할 테니...
세나의 뜬소문을 읽은 후, 야생마가 어디에 모여 있는지 보러 밖으로 나갔다. 마구간 울타리 밖을 도는데 뭔가 튀어오르는 게 있어 얼떨결에 잡았다. 잡고 보니, '원기메뚜기'라는 것이었는데 - 아, 그렇지! 원기메뚜기로 체력을 보충하는 물약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훈련을 할 때 체력을 소진하여 나가 떨어질 정도로 지치면 마시곤 했던 약이었다. 당장 만들어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솥에 가서 원기메뚜기와 몬스터 소재를 넣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연기와 함께 반짝거리는 빛이 나며 물약이 완성되었다.
물약이 완성되었는데, 어라? 생명력까지 보충해주는 효과가 생기다니! 요리가 잘 되면 이렇게 빛이 나는 효과가 생기는 걸까?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아주 신이 났다.
그런데, 요리를 마치고 보니 갑자기 하늘이 붉게 변했다. 붉은 기운이 어디선가 번져 하늘을 물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기운은 하이랄 성을 바라볼 때 느꼈던, 그 원념의 붉은 기운과 비슷했다. 하늘을 쳐다보니, 빨갛게 물든 구름 사이로, 피빛으로 변한 달이 떴다.
달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젤다 공주였다.
"... 조심하세요... 링크...
붉은 달의 ....... 가논의 마력.... 몬스터...."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집중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았는데도 내 눈 앞에는 하이랄 전역이 붉은 빛에 물들며 붉은 달의 기운이 퍼지는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내가 몬스터를 쓰러뜨렸던 장소에 다시 몬스터들이 되살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곧 그녀의 근심 가득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 조심하세요... 링크...
붉은 달의 시간...
그것은 가논의 마력이 충만한 때...
지상을 떠도는 몬스터들의 혼이 다시금 육체를 되찾아 버립니다......"
붉은 달이 뜨는 시간이 되면, 사라졌던 몬스터들도 충만해진 가논의 마력으로 다시 되살아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아... 그녀가 가논을 봉인하고 있어도 가논의 마력은 이렇게도 강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젤다 공주의 힘이 다해가는 시기라 가논의 힘이 방출되는 시기가 있는 것인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가 물리쳤던 몬스터들은 붉은 달이 뜨면 다시 생성되며 - 그것은 재앙 가논이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된다는 소리인 것이다.
"링크.....
조심...하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져 나는 눈을 떴다. 아까보다는 붉은 기운이 약해지더니 둥근 달에서 빨간 빛이 점점 가시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빛은 모두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구간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렀고, 부드러운 밤공기가 나를 에워쌌다.
사람들은 붉은 달이 떴는지 아닌지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붉은 달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금방 끝나서인 것인지... 궁금해서 마방간 앞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마구간 직원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고 밝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상냥히 대해 주었다. 그 천진난만함에 나는 그만 다른 질문을 하고 말았다.
"...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저요? 저는 페너라고 해요. 여기서 말을 돌보고 있는데요. 아참! 여행자님, 말의 고삐나 안장을 변경하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등록하신 말의 마구나 장식을 변경해 드리고 있거든요. 필요하시면 다시 말을 걸어 주세요. "
그녀는 내가 말을 데리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나중에 다시 말을 걸어달라고 하고는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자 마구간 주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요리솥 아래의 장작도 곧 불이 꺼졌다.
나도 텐트 아래로 들어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비가 내리는 지금이야말로, 동물들이나 몬스터에게 나의 발소리를 들키지 않키지 않게 된다. 기사 훈련장에서 배웠던 것으로, 기습을 할 때는 궂은 날씨를 이용하는 전략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구간 울타리를 너머, 절벽 아래에 모여 있는 야생마 무리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말의 색깔은 의외로 다양했다. 갈색 말은 온순해 보였지만 왠지 힘차 보이지 않았고, 청색 말은 튼튼해 보이긴 했으나 박차를 가했을 때의 속도가 왠지 떨어질 것 같았다. 세 마리 중에서 가장 짙은 색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이라면 다루기는 좀 까다로울 지 몰라도, 언덕을 치고 올라가거나 어려운 길도 잘 헤쳐나갈 것 같은 믿음이 왔다.
망원경으로 점찍은 녀석을 다시 살펴보았다. 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이 말은 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여기저기를 즐겁게 쏘다녔다. 말이 움직이는 대로 망원경으로 보다가, 바위 옆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숙여 조심스레 다가갔다.
역시 비가 내려서 그런지, 내가 근처까지 다가가도 크게 경계하지 않는다. 말이 절벽 쪽으로 이동을 슬슬 하기에 더 몸을 숙이고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흑색에 가까운 갈색 말이었다. 늠름한 말의 모습에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의 등에 올라타 함께 호흡하며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말의 등근육이 요동칠 때, 전해져 오는 그 에너지... 맞바람의 시원함...
'하앗!'
갈색말의 바로 옆까지 다가갔을 때, 나는 숨을 죽이면서 훌쩍 뛰어올랐다. 말의 등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갈색말은 거세게 저항했다. 나는 말의 갈기를 움켜잡으면서 등을 쓰다듬었다. 마구간에서 알려준 대로 열심히 쓰다듬었으나 나의 체력으로는 이 거친 반항을 모두 버텨내기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크게 앞뒤로 뛰며 내 몸을 튕겨내려 할 때, 아까 만들어 둔 원기 물약이 생각났다. 얼른 꺼내 꿀꺽 마시고, 말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사나웠던 말이 조용해졌다.
"워...워..."
내가 한번 더 쓰다듬자, 녀석은 기분 좋은 듯 히힝거렸다. 됐다! 야생마를 잡았다! 등을 툭툭 두드리며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기를 잡아당기자, 약간은 귀찮다는 반응이 왔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말을 살살 달래서 마구간 방향으로 끌었다. 중간에 박차를 가해 보려고 말의 배 아래를 걷어찼다. 약간 놀라더니 훅 뛰는데 속도가 상당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말을 타고 마구간으로 돌아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마구간 주인은 야생마를 잡아 온 나를 반기며, 말을 등록하겠는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 등록비로 20루피를 지불했다. 등록을 마친 말에는 기본 고삐와 안장이 채워졌다.
나에게도 말이 생기다니! 흡족한 마음에 녀석을 계속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부지런히 풀을 뜯는 녀석을 바라보다, 빨리 친해지고 싶어 사과 몇 개를 가지고 가까이 다가갔다. 새로운 말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 경계를 풀었는지 사과 하나를 받아 먹었다. 아그작 아그작 사과를 금새 해치워버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말에게 사과를 다 먹이자, 말이 나를 좀 다른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고삐를 슬쩍 잡고,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순해진 눈이다. 그래그래. 이렇게 조금씩 친해지면 되겠지. 말을 다루어 보며 나는 확신했다. 100년전 나에겐 분명 아끼는 애마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 말이 어떤 말인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든 함께 달렸던 - 가족같은 말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는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를 나의 모험에 함께 할 친구를 얻은 기분에 말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말을 타고 마구간을 떠나 새로이 길을 나섰다. 힘차게 달려나가는 말머리 너머에는 또 새로운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