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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Jun 26. 2018

발리니즈의 자부심

그리고 프랑스인의 자부심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헬멧을 벗고 근처 아무 상점의 처마 밑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살갗 위로 송골송골 맺혀있는 비를 털어내며 구르릉 앓는 소리를 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건조한 시드니의 여름이 그리워지는 날씨다. 발리의 우기는 습기 찬 포장지 안의 버섯처럼 눅눅하고 축축 쳐져있다.


 한창 먹구름과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싸움이 났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구경보다는 유리창 건너 싸움 구경이 더 재밌을 것 같아 얼른 시선을 틀었다.


 카운터에서는 금발의 호주 여인 두 명이 난감한 표정의 발리니즈 종업원을 앞에 놓고 자기네들끼리 키득거리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요청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은 눈치였다.


 '또 저런다, 또.' 인도네시아는 영어가 공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외 여기저기서 굴러온 투어리스트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영어로 직원과 현지인들에게 말을 거는 곳이었다. 물론 유명 관광지이기 때문에 종업원들의 만국 공통어 숙지가 필수 아니겠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지금 날씨처럼 꾸리꾸리 한 이 기분. 손님들에게 연신 Sorry를 연발하는 종업원을 멀찍이서 바라보는데 문득 프랑스에 여행을 다녀왔던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때는 1년 전 겨울. 홀로 여행을 떠났던 B는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시기적절하게 와이파이 시그널은 오리무중. 하지만 요즘 말로 '핵인싸*'인 B는 스스럼없이 길에 지나가는 또래를 붙들고 궁금한 사항을 묻기 시작했다. B는 여행지인 만큼 당연하게 영어를 사용했고, 상대방은 계속 프랑스어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프랑스어를 몰랐던 지인이 몇 번 더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다가 '얘는 영어를 못하는가 보다' 하고 뒤돌아서는데,

 


여긴 프랑스잖아.
네가 프랑스어로 물어봐야지.
내가 영어로 대답해야 하는 게 아니라.



 깔끔한 영어가 뒤에서 또박또박 들려왔다고 했다.

 

 그때 해프닝을 얘기하며 B는, "아니, 그렇게 드높은 자부심을 갖고 있으려면 프랑스어가 전 세계 공용 어였어하는 거 아냐? 아무튼 파리지앵들은 쓸데없이 콧대만 높다니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핵인 싸: 아주 커다랗다는 뜻의 '핵'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사이더(insider)'의 합성어로, 무리와 섞이지 못하고 밖으로 겉도는 아웃사이더와는 다르게 무리 속에서 아주 잘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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