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애고아, 친일파, 부평초 같은 작은 애기씨, 하인과 혼례를 올리고 귀밑머리를 푼 여자, 아라사俄羅斯의 옷을 입은 조선 여자..
서희가 길상을 남편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길상을 최 씨 가문을 위한 부역자로 붙들어 놓기 위한 새로운 장치. 길상은 본디 우관선사의 의해 최참판댁 가문으로 넘겨진 절의 아이로, 태생적으로 노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야 찬밥 더운밥 제 신세도 모른 채 사랑방에 장작으로 군불을 때우던 아이였으나, 점점 머리가 커갈수록 자유에 대한 또 자신의 신분에 대한 괴념스러운 나날이 많아지는 길상을 보고 내린 결정 이리라. 바로 단 한 가지 목표, 기운 가세를 바로 세우고 빼앗긴 토지를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길상이 서희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질려하는 이유는 저런 쇠붙이 같은 차가운 집념 때문이다.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해 자존심을 버린 것은 아마 윤 씨 부인이 장롱 및에 숨겨 놓은 은괴를 지니고 도망치듯 평사리를 벗어나야 했을 때부터, 아니, 조준구가 최 씨 가문 솟을대문 사이로 걸어 들어왔을 때부터 일지도 모른다. 그가 이다지도 자존심을 버릴 수 있었던 까닭은 결코 꺾을 수 없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것이 최서희를 감내할 수 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변인들은 서희를 가여워하면서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된, 최서희. 홀로 연소하고 있는 지척의 불길은 아름답고도 선연하며, 뜨겁고 또 외롭다. 그래도 그것은 지치지 않고 타오르며 그 어느 것에도 기생하지 않은 채 다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가장 뜨겁고 또 가장 싸늘하다. 길상은 서희라는 불꽃의 장작이다. 길상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한때 그 운명을 벗어나 보려, 외면하려 했으나 결국 화마에 갇히고만 자신의 신세를 말이다.
길상이 그랬던가? 자수를 놓고 있을 때도 바늘 끝에 온 진심이 서려있는 무서운 여자라고. 그 집념과 결단이 서려 천을 뚫고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쉬이 내려가지 않는 빗장과 결계. 서희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제 어린 인생을 통해 배운 것이다. 제집 대문 안으로 아무나 함부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준구를 보며 인생을 통해 배운 것이다.
최서희. 벼리고 벼려진 단단한 칼날.
앞으로 총 12권의 토지가 남았다. 아주 어린 서희로 시작한 책은 그의 죽음까지, 노년까지 함께 달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