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rain Drai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Mar 10. 2020

토끼 달과 슈베르트

불행할 이유가 없어서 행복하기로 했다


"엘리, 우울할 땐 산책이 최고야."


늦은 시각 염병로를 함께 걷던 길동무 샤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했다. 염병로는 둘 다 기분이 ㅈ같은 날 걷게 된 산책로에 즉흥적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앞으로 둘 다 염병 떨고 싶은 날엔 여기 걷자'는 깊은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둘 다 지지리 궁상 같은 고민을 하면서 밤 산책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 염병로를 찾는 날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러니까, 거의 24시간 만에 혼자서 염병로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염-병할..


나는 묘한 우울감과 패배감에 휩싸여 비에 젖은 산책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귀에 이어폰을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궁상을 떨기 위해서는 가로등 불빛에 행여 내 촉촉한 눈가가 비치지 않도록 후드티를 뒤집어써 주어야 하며, 외부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꽂아주는 것은 궁상의 필수 옵션이다. 어쨌건 나는 염병 천병 떨 무장을 하고 터벅터벅, 고독한 순례자처럼 밤길을 걸었다.


맨 처음에 들었던 곡은 바흐의 성가 전주곡이었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의 이유 없는 비참한 기분에 양념을 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선곡임은 분명했다. 한 곡의 러닝타임은 20여분 가량이었고, 나는 정확히 곡 시작과 끝까지 내내 우울했다. 그냥 이유도 묻지 않고 우울해했다. 그냥 다 ㅈ 같았다. 아마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기분이 ㅈ 같을 때 그 ㅈ같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ㅈ 같음의 최고점을 찍은 것임을.


그렇게 염병로 터닝포인트에 접어들었다. 나는 다시 집에 돌아가기 위해 발 길을 돌렸는데, 그 순간 무심결에 올려다본 하늘에서 엄청나게 충격적인 요소를 발견했다. 바로, 휘영 찬란한 보름달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분명 반대편에서 걸어올 땐 달무리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달이 뜨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시야에 달이 안 보였던 것뿐이었다. 내가 바흐의 성가곡을 들으며 깊은 우울을 곱씹을 동안 저 휘영 찬란한 달이 내내 내 뒤꽁무니를 비춰주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내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 주변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뒤를 돌자마자 정면으로 마주친 밤의 태양과 한참 눈 씨름을 하다가 플레이 리스트를 바꿨다. 이번엔 슈베르트. 어쩌다가 내가 슈베르트를 듣게  되었더라? 아마 최근에 읽었던 어떤 소설에서 주인공이 슈베르트 음악을 좋아한다고 얘기해서였을 거다. 그 주인공이 누구였더라? 요사리안? 야콥 폰 군텐? 정확히 기억해 내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슈베르트를 듣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Allegro vivace를 들으며 염병로를 되짚어 올라가는 내내 밤의 태양, 달과 눈싸움을 했다. 오늘은 정말 그 커다란 원형의 커튼 뒤에 토끼 얼룩이 묻어 있었다. 엊그제 봤을 때는 그 안에 활을 겨누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절구에 방아를 찧는 형상은 아니었으나, 상체를 반쯤 세우고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혹은 냄새를 맡는 듯한-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그 실루엣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지금 우울한 거냐고. 왜 비애에 젖어 불행해하고 있냐고 말이다. 나도 미치지는 않았으니, 달에게 대답이 오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자문자답을 해보기 시작했다.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해야 했기에 열심히 이유를 뒤적이는데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세히 생각해보니 나는 1년 전에 나보다 훨씬 잘살고 있기까지 했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근데 지금 왜 궁상떨고 있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 싸매고 생각을 해봐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럴싸한 이유가 무엇 하나 제대로 문장 구조를 갖추어 떠오르지 않은 채 염병로를 맴돌기를 몇 십분 째. 


나는 갑자기 엄청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ㅈ같은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니, 

난 ㅈ같지 않는 거다! 

난 ㅈ되지 않는 거야! 

생체 딜도가 아니었던 거야!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알몸으로 벌떡 일어서며 유레카를 외치듯, 

나는 염병로에서 슈베르트를 듣다가 갑작스레 뜀박질을 하며 나는 불행하지 않다!!! 고 -속으로만- 외쳤다. 


나는 ㅈ되지 않았다!

나는 성인용품점에 진열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다!

고로, 

불행하지 않으니 나는 행복한 거다!!


염병천병로에서 갑자기 야밤에 달을 쳐다보며 히죽히죽 이상한 웃음을 걸고 뜀박질을 시작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소?


야하- 나는 딜도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생님, 밖에는 지금 비가 한창 내리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