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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Jul 09. 2019

선생님, 밖에는 지금 비가 한창 내리고 있습니다.

작가 박경리와 나누는 차담茶談

 


 비 오는 날은 여름의 호신호다. 더위가 깊어질 조짐인가 아니면 한 풀 꺾일 조짐이던가. 그래도 비 내리는 이른 아침은 달갑다. 여기가 발리였다면 비 내리는 야트막한 정원을 바라보며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평소에 시답잖게 넘기던 풍경에 새로운 색깔을 입힌다. 눈 길이 닿지 않던 곳도 그럴싸하게 뒤바꾸어 놓는다. 마음 어딘가가 소란스러워지기도, 잠잠히 가라앉기도 하는 그런 날들이다. 


 박경리는 쉬이 잊히는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마을 길을 걸으며 입을 꾹 다문 노인조차 그냥 스쳐가지 못하는 마음. 한 시절 비단 치마를 둘렀던 노류장화에서 퇴기가 된 이에게도'물보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에 꾹꾹 눌러담는 무른 가슴 뼈. 가장 낮은 곳의 이야기를,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 개개인에게 얘기책을 선물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물 묘사에는 언제나 애정이 담겨있다. 공노인이 김환을 바라봄직한 시선이랄까.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 능청스럽게 눈 길을 돌리며 미소하고 마는. 어딘가에서 울고 와서 시뻘겋게 핏줄이 서 있는 눈을 보고서도 짐짓 모른 척. 못 본 척. 넘어가 준다. 그것은 애정이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 박경리는 그런 따스한 마음을,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있는 촉촉한 눈매를 가진이었으리라. 


 그의 저택에서 함께 차담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손수 일구시던 작은 텃밭에 가만가만 나리는 비를, 여름을 재촉하는 비를 함께 바라보며 말이다. 별말씀이 없으시다가 문득,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얘기하려나. 인자 꽃구름 같던 시절은 다 흘러가부렸소,라며 희게 웃을 그가 눈에 선하다. 그래도 책상 위에 원고지와 펜이 있어 노년이 썩 외롭지 않다 하던 그가 있을 것이다. 야야, 니는 와 글을 쓰노?라고 내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뭐라 답변해야 좋을까. 

 '정제되고 다듬어진 것은 그 자리에 남으니까요. 말과 감정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도 글자는, 새겨진 글자는 증발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문자는 더 애틋한 법인가. 그래도 선생님, 계속 글이란 것을 써나가다 보면은 언제가 다른 뜻이 생기기지 않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글을 진득하니 쓴 것도 일 년 밖엔 안되었는걸요. 그래도 지난 내 인생 중에 가장 치열하게 매달렸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적으며 보니 저는 이미 선생님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먼 경남 땅까지 직접 가지 않아도, 매일, 매일을 선생님이 남긴 문장을 읽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당에서 작가 박경리와 가장 가까운 이는 내가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 차담 없이도 이리 가까이서 선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 그러니 혹여 멀리 서라도 외로워마시길. 누군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에도 흐름이 있다면, 선생님은 바다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러니 너무 외로워 마시길. 


 선생님, 밖에는 지금 비가 한창 내리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도 비는 내릴 줄을 알아요. 그래서 마음이 더 쓰입니다. 그 마음 씀씀이가 선생님을 꼭 닮은 것 같아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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