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Sep 18. 2020

왜 비에 젖은 떡볶이는 유독 더 맛있는가?



“늦은 저녁에 집에 돌아갔을 때 아무도 없거나, 또 비나 눈이 쏟아질 때 아무도 마중 나올 사람이 없으면 쓸쓸하지 않을까?”


한 지인은 주변에 늘 사람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인간 댕댕이’같은 스타일인데, 완전한 독립공간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룸메이트나 하우스메이트가 존재하는 생활 환경을 선호했다. 그에게는 가족 공동체를 꾸린 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옵션이었다. 직업이 프리랜서인만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장치가 가족 단위로라도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심리적인 안정감에 좋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도 했다. 그의 말도 충분히 공감이 갔다. 나에게도 고독에 대한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니까. 내가 유달리 다른 사람들보다 주체적인 자아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불안해 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는 쪽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소속감과 연대감이 필요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만, 1인 가구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거야’라고 그 어느 쪽에도 심리적 배수진을 치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공간에서 사람 냄새가 났으면 좋겠어.”


마중이나 배웅 같은 따스함이 필요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다큐멘터리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인데, 어느 만화 작가는 일본에 마련한 집을 나설 때마다 일부러 베란다 쪽에 이불이 잘 보이게 펼쳐서 걸어 둔다고 했다. 멀리서 걸어올 때 베란다에 걸린 이불이 보이면 마치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덜 외롭기 때문이라고 했다(근데 알고 보니 그 작가는 기혼자였다. 뭐, 어쨌거나).




글쓰기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런 문자가 들어왔다.


[금일 현재 서울지역에 많은 비가 예상되오니, 입산 금지 및 산사태 발생우려 거주민분들께서는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 바랍니다.]


지하철을 타고 ‘구’를 이동할 때마다 귀신같이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중구청, 노원구청, 도봉구청, 강북구청에서 차례로 나를 걱정해 주더니 마침내 행정안전부에서까지 나서서 내 안전을 걱정(?)해줬다. 종착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보니 역시나 맹렬한 기세로 비가 퍼붓고 있었다. 나처럼 미처 우산을 챙겨 오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바쁘게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응응, 나 지금 역 앞이야.

곧 그칠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비를 내다 봤지만, 한동안 그럴 생각은 없는 듯 대찬 기세로 쏟아 붓고 있었다. 나는 터벅터벅 빗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내 모습을 봤다면 하얀 장막 안으로 마법사처럼 쏙 사라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삽시간에 물통을 뒤집어쓴 생쥐꼴이 되자 문득 떡볶이 생각이 났다. 인간의 몸은 신기하게도 물에 닿는 면적이 넓어지는 순간 극심한 허기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모든 인간이 아니라 나란 인간에 한정된 조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늘 저녁 메뉴가 편의점 떡볶이로 낙찰이 된 순간이었다. 한참 길을 가다 말고 다시 몇 걸음 돌아가서 편의점에 들렀다. 젖은 생쥐가 집어 든 것은 우산이 아닌 인스턴트 떡볶이였다. 집에 에어프라이어와 캡슐 커피 머신은 들여놨어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아마 인스턴트 푸드를 지양하겠다는 마음 가짐이었겠지) 아직 전자레인지는 없었기에 편의점 안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다가 전자레인지에 2분 30초 돌린 다음, 뚜껑을 다시 닫고 조심조심 빗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다시 걸어 들어가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불 꺼진 상점 창가에 비친 내 옆모습이 보였다. 입가에 슬금슬금 웃음이 비집고 피어 올랐다. 비에 쫄다닥 젖으면서도 혹여 음식에 물이 들어갈까 소중하게 움켜 잡고 있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웠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을까? 몸이 젖는 것 보다 오늘 저녁으로 먹을 음식이 젖는 게 더 신경 쓰일 사람이.

이상한 일이었다. 비가 쏟아져도 우산 들고 마중 나올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 가면 누가 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지금 나는 내 신세가 왜 이렇게 유쾌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람들과 함께 보내다 온 시간 덕분에 내 영혼이 전자레인지에 2분 30초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따뜻하게 덥혀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새 수영에 푹 빠져 있어서인지 몰라도 마치 수영을 마치고 나와서 샤워 부스 아래서 물줄기를 맞고 있는 느낌도 들고 말이야. 내 로망 중 하나가 비 오는 날 야외 수영을 해보는 것이었는데, 아마 지금 이런 느낌과 비슷하려나? 바닥 위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 빗방울 전주곡. 통, 통, 통, 하고 내 기분에 부딪쳐 다시 튀는 즐거움. 나는 빗줄기 아래서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인의 단서를 찾아 거리를 오가는 셜록 홈즈가 되기도 하고, 산 속에서 알몸으로 빗 속에 뛰어든 카프카가 되기도 하다가 국물 떡볶이를 잡고 느긋하게 빗 속을 걸어가는 나로 되돌아온다.

유쾌한 밤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열자 마자 문 앞에서 내 발소리를 듣고 마중 나온 반려 고양이를 향해 ‘야, 임마! 네가 우산 들고 마중 나왔어야지!’라고 실 없는 소리를 한번 지껄인 다음 겉옷만 벗어 세탁기에 던져 넣은 채 맛있게 떡볶이를 먹었다. 물은 신기하다. 왜 수영이 끝나고 나와 마시는 초코 우유는 더 맛있으며, 비에 젖어 먹는 떡볶이는 왜 유독 더 맛있는가? 이렇게 지속될 수 있는 삶이라면, 외롭지 않겠구나, 그런 기분에 사로 잡힌 어느 저녁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pinspiration
작가의 이전글 COWS_02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