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을 통해 만난 지인 R은 덤덤한 투로 얘기했다. 그는 몇 년 전에 캐나다로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캐네디언 아빠들이 요리와 육아에도 적극 참여하는 데다가 살림까지 야무지게 해내는 가정적인 모습을 보고 한국에 돌아와 새삼 -엔트리 쇼크 Re-Entry Shock(역문화 충격)를 받았다고 토로했다.
“현실적으로 저런 남편을 구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든 거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미 허들은 높아져 버렸는데, 그걸 다시 낮출 수도 없고 딱히 그럴 얘기도 없다는 말이었다. ‘마치 스마트 폰을 쓰던 사람이 폴더 폰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라는 그의 비유를 듣자 한 번에 바로 이해가 되었다. 설령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남편이 될 수 있는 자질-유순하고 가정적이며 살림과 요리를 좋아하고 깔끔한… 등등 자세한 신체적 조건 설명은 생략한다-을 갖춘 남자가 있다 해도 함께 가정을 꾸릴 수 있는 확률을 따져 보았을 때 현실 가능성이 희박함을 인정한 것이다. 우선 어디서 만나야 할 것이며, 만났다 하더라도 서로 끌릴 수 있을지, 연애까지 발전했다고 해도 결혼을 할 수 있는 조건인지, 서로 집안 분위기는 어떤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등 거쳐야 할 관문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R=VD, 시크릿 등 엄청난 자기실현 긍정 확언의 버프를 받아 결혼한다 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게임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았다.
“결혼 후에 서로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떻게 해요?”
새로 산 가전제품 제품 보증기간을 가지기라도 한다. 품질, 성능, 기능 하자에 대하여 무료수리를 해주거나 정도에 따라 반품 혹은 환불이 되는데, 애석하게도 인간에게는 제품보증서가 없다. 보증인도 물론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개팅을 받는다고 하지만 주선자가 결혼으로 야기된 정신적 경제적 피해보상을 책임 졌다는 얘기는 7-80년대 신파극에도 안 나온다(하지만 21세기에는 김장 김치로 싸대기를 때린다). 서장훈도 어느 쇼 프로그램에 나와 ‘제발 신원이 보장되지 않은 사람 좀 만나지 마세요.’라고 이혼남의 입장에서 열변을 토하지 않았던가.
“연애는 하죠. 근데 결혼은 잘 할 자신 없어요. 확신이 없거든요. 엄마 같은 남자라면 또 모를까…… 어쨌거나 이래저래 골머리 썩히느니 저랑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비혼 메이트 친구 셋이서 돈 모아서 아파트 한 채 장만 하려고요.”
ⓒkaerusensei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사실 내가 결혼에 대해 생각할 때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엄마 같은 남자 있으면 결혼할 것 같아’에서 ‘엄마 같은’이라는 표현은 표면상 의미 그대로 엄마 같은 ‘인간’이 아니라 집에서 엄마 같은 역할, 즉 무급으로 돌봄 노동을 해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격주마다 독립한 딸의 집에 와서 반찬을 해 다 텅텅 빈 냉장고를 채워주고, 긴급구조 SOS라는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방을 치워주는 등 무급 봉사를 하는 엄마에게 ‘남편이 엄마만 같다면 나도 기를 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혼에 매달려 볼 텐데’라고 했다가 ‘차라리 돈 많이 벌어서 가정부를 들여라’는 현답을 들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강냉이를 씹으며 껄껄 웃자, 엄마는 설거지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