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스타트업 Co-founder 자리를 사임하며 휴식기를 가졌던 J 언니는 그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이룬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언니가 처음으로 ‘ME TIME(영미권 국가에서 쓰이는 표현으로 혼자만의 시간, 혼자서 보내거나 즐기는 시간을 뜻한다)’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하에 있는 헬스장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운동하고,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 공원을 돌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집 근처 대형 브랜드 마트에서 신선한 식자재를 사 삼시 세끼 자신만을 위한 건강한 요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명상하며 혼자서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그 시간을 통해 그동안 집안의 장녀이자 회사의 간부로서 기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대로 혼자 쭉 살게 될지 마음이 잘 맞는 라이프 러닝 메이트를 만나 함께 살지 아직 어느 쪽으로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혼자 지내는 순간은 짝을 만나기 전까지의 [임시적]인 유예 기간이 아니라 이 또한 하루하루 풍족하게 채워가야 하는 온전한 삶의 국면 중 하나라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이때 느꼈던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팁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Me Time과 관련된 큐레이션 콘텐츠를 제작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오히려 혼자된 시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자신만의 도구를 발견한 셈이다.
얼마 전 KT & G 상상 마당에서 개최한 ‘나 혼자 산다’ 전에 참여했던 이연옥 작가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었다.
“순간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관조적 시각을 기르되 유연한 마음가짐으로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다 보면 자신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당시 전시 팸플릿에는 ‘세상과 끊임없는 소통’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었다. 1인 창작자이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작업하지만, 절대적 작업 시간과 별개로 결과물이 도출될 때까지 많은 사람의 직간접적인 도움과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 부분에서였다.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간에서 자그마치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마치 식물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 종종 해프닝처럼 벌어지거든요.”
이 작가는 자신을 후원하는 의미에서 영국에서 귀국 후 카페를 운영했는데-현재는 작업 스튜디오로만 쓰이고 있다-, 안정적 수입에 대한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자 운영하게 된 의도만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것들을 덤으로 얻게 되었고 했다. 바로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카페라는 장소의 특성상 오가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다 보니까 점점 제 영향을 받게 되더라고요.”
모든 것은 우연의 이름표를 단 스침으로 시작되었다. 근처에서 꽃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들러 장사 후에 남은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좋아하던 책의 감리를 맡았던 편집자가 방문하기도 하고, 또 매장에 와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던 손님이 ‘이런 노래도 좋아하실 것 같다’며 취향에 딱 맞는 음반을 추천해 주기도 하는 등의 소소하고 의미 있는 호의들이 하나둘 쌓이며 타인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긍정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번에 KT & G 인디 레이블 전시에 참여하게 된 것도 전에 카페를 방문했던 손님 중에 전시 기획 관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카페 안에 진열된 작가의 작품을 보고 정기 워크숍을 제안했다가 이번 나혼산 전시까지 인연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카페 운영을 할 때, ‘출근할 때는 혼자이지만, 막상 퇴근할 때는 혼자인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카페이자 개인 작업실을 방문하는 이들의 가벼운 피드백도 도움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술관에서 일할 때와 달리 독립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는 창작물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직접적인 기회가 줄어들었는데, 카페를 오픈하고 나서 작품을 진열해 놓기 시작하자 현장에서 방문객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어 작업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어떤 스타일의 작품이 유독 손님들의 시선을 많이 끄는지, 또 어떤 폰트나 스타일에 사람들이 반응하는지 등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방문객들의 긍정적인 피드백과 에너지는 다음 창작 활동의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연옥 작가는 1인 창작자이지만 그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불특정 다수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업 공간은 타인들과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지는 교집합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만 나를 찾는구나, 자기가 아쉬울 때만 나를 찾는구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기 시작한 거죠.”
가수이자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솔비가 사회 공헌 활동에 지속적인 접점을 찾는 이유도 혼자만의 공간에서 세상에 돌아갈 문을 찾는 과정이었다. 여자 연예인이기에 더욱 노골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여러 가지 불편하고 힘든 상황과 그로 인해 야기된 상처 때문에 혼자 남겨진 고독감에 사무쳤을 때 시작한 미술과 봉사활동이 자신에게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회복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긍정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뮤직뱅크라는 방송을 통해서 Red라는 작품 탄생 과정을 시연한 것도 제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과감하게 먼저 대중에 오픈해서, 저와 비슷한 결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고 싶어서 였거든요. 이런 공유와 연대의 과정 자체가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한 거죠.”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동생의 장화를 떠올렸다. 동생은 본인이 가장 고독하던 시기 내내 차 트렁크에 장화를 비롯한 각종 작업용 도구들을 챙겨 넣고 매주 경기도에 있는 유기견 보호 센터로 봉사활동을 다녔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의 다른 생명과 연결된 존재이며 뿐만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존재의 고독감에 어느정도 위안을 준 모양이었다.
내가 ‘혼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 고독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은 것은 바로 세상과의 접점을 찾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초적인 고독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우리가 유독 고독감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사람들과 떨어져 있을 때라기 보다는 세상과 혹은 타인과의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 받을 수 없다고 느낄 때는 모두 자신만의 영역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니까.
J 언니의 활동을 통해 자신 먼저 온전한 하나의 ‘원’이 되어야 다른 ‘원’과 교집합을 이룰 공간이 어디인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고, 이연옥 작가를 통해 연못 속의 퍼져가는 파문처럼 타인들과 찾아낸 여러 교집합을 통해 자신의 세계 속에 물결 모양으로 이루어진 무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또 솔비 작가와 동생을 통해 세상의 다른 존재에게 다가가는 이타적 행위를 통해 먼저 교집합을 만들고자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고독감을 해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사랑을 구걸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먼저 나서서 사랑을 나누는 주체자로 변한 거예요.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삶이 충분히 낭만적이어지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