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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Brain Drain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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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Nov 25. 2020

나를 무너뜨리는 것들

너도 사소한 거에 죽고 싶어하다가 또 금세 소소한 일에 살고 싶어하잖아.



“8월에 내렸어야 할 비가 이제야 쏟아지는 모양이네.”



9월. 창밖으로는 가을비가 깊은 밤중에 누군가 곁에 누워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잔잔하게 속닥거리고 있었다. 곧 밤이 되었다. 모녀는 살짝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고, 방금 부쳐낸 파전 조각에선 아직도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공기를 고소하게 데우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런 법이야. 좀 늦더라도 결국 제 할 일은 다 하고 돌아가거든.”



비 오는 오후에 파전 조각을 뒤적이다가 들은 말치고는 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엄마의 감상에 대꾸하는 대신 막걸릿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떡꿀떡. 때로 말은 발효주처럼 밖으로 낼 때보다 속에서 묵힐 때 향이 더 진해진다. 부연 가스등 같은 액체가 섣부른 음성언어와 뒤섞여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언젠가 스치듯 들었던 언어유희가 알싸하게 취기처럼 올라왔다.


시선(sight)을 안(in)으로 거둬라. 그리할 때 얻어지는 것이 바로 통찰력(in-sight)이다.


푸르고 퍼런 빛을 띠던 접시가 제 본연의 하얀 빛을 되찾아갈 즈음, 진동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친구와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입가에 묻은 기름이라도 좀 닦고 나가라. 나 방금 파전 먹고 나오는 길이오, 하고 온 동네방네 소문 내고 다닐 일 있니?”



나는 손등 대신 혀를 사용하여 입가에 묻은 아쉬움을 핥아내고 겉옷을 챙겨 들었다. 현관을 나설 때 등 뒤에서 고양이가 갸릉갸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빗물이 우산 위로 합선된 전화 내용처럼 뒤섞이며 맺혔다. 나는 그리운 누군가의 전화벨 소리를 듣는다. 내게 닿는 번호를 잊어 차마 전해지지 못한 목소리가 비에 섞여 우산 위에 그리듯 쓰이고 있었다. 하염없이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빗방울 탓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전보다 더 낮고 가깝게 다가왔다. 오래된 골목길 사이로 걸음이 옮겨졌다. 딸은 볕 좋은 날에는 들리지 않는 미세한 분위기와 소리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반질반질한 감나무 잎사귀 위에서 무의미가 상실되는 소리. 물방울들은 맺힐 새도 없이 퉁겨진다. 잠시 머물렀다 고분고분, 그러나 섧지 않게 여백을 만든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은 사이 어느새 골목 어귀 카페 앞에 다다랐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수채화 가장자리처럼 웅웅거리며 카페 문턱을 넘어 거리까지 번져 나왔다. 잔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말소리…. 비 내리는 가을밤은 소리마저 녹여 하나로 뒤섞고 있었다. 칵테일. 떠오르는 차가운 새벽 공기 속의 멜버른 거리. 그곳에서 나는 공기 대신 술을 섞어 소리를 취하게 만들곤 했다.



“이 시간에 아메리카노 마셔도 잠을 잘 수 있어?”



카운터에서 만난 친구가 주문을 하는 내게 딴죽을 걸어왔다.



“리스트레토로 마셔도 3분 컷이야.”



그가 킬킬거릴 때마다 금빛 귀걸이가 그의 시원한 목덜미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친구의 웃음 소리가 여름 오후의 아스팔트 위로 추락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둥글고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별게 다 숨 넘어가네.”



“원래 난 사소한 것들이 소소하게 웃기더라.”



우리는 얼그레이 쇼트케이크를 테이블 가운데 놓고 이마를 맞댄 채 ‘사소한 것들’이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네가 변태라서가 아닐까? 야 근데 여기 케이크 맛집이다.”



어느새 케이크는 반이 넘게 줄어 있었다. 아, 나는 생각에 집중하느라 아직 한입밖에 못 먹었는데.



“너도 사소한 거에 죽고 싶어하다가 또 금세 소소한 일에 살고 싶어하잖아.”



봄철에 아득한 꽃 멀미가 나기까지 흩어진 꽃무덤을 제 신발에 묻히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려고? 동네 야산이 설산 봉우리가 되기까지 한겨울에 진눈깨비를 스치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려고? 우리는 모두 그런 소소함을 밟고 살아간다. 소소함의 잔해 위를 걷고 또 걸어서.



“한 마디로 커피 같은 거야.”



“하던 지랄 계속 하소서.”



“가끔 이유 없이 마시는 커피가 가장 맛있는 법이거든.”



친구는 담배를 꺼내 물다가 말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나는 내가 방금 지껄인 지랄이 마음에 들어 히히거리며 웃었다.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순수함마저 빠진 채로 내 삶의 순간에 뛰어드는 그런 종류의 사소함이 있다. 그런 의도하지 않음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때로 낮잠 자는 고양이의 볼록 튀어나온 입매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서 목멘 소리가 나오듯이.


그러니까 살짝 뺨을 스쳐 간 빗방울의 차가움 같은 거 말이야. 코인 빨래방 앞을 지날 때 스치는 섬유 유연제 냄새라든지, 겨울 초입에 온종일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고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붉은색, 노란색의 낙엽 비, 그런 것들 말이야. 참방참방 대신에 사박사박하는 소리가 나고, 마른 낙엽 흙냄새가 아니라 축축한 풀 냄새가 난다니까.

 뭐, 그런 것들.


 따뜻한 커피가 담겨 나온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을 때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 있잖아. 그런 것들 말이야. 굳기 전에 꾹 눌러 보는 촛농의 질감 같은 거. 네가 진짜 웃겨서 웃을 때 살짝 찡그려지는 코끝 같은 거.

 뭐, 그런 것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내 감정을 흔든단다. 어제는 지하철을 타러 플랫폼으로 내려갔는데, 어디선가 귤 냄새가 나는 거야. 내가 즐겨 타는 1-1라인 앞 나무 벤치에서 어떤 할머니가 귤을 까먹고 계셨지. 자그마한 귤 하나로 노란색 라인 전체에 상큼한, 달콤한 향이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 크기보다 질량이라는 말도 떠올랐어. 선한 존재감이란 그런 것인가 봐. 존재의 향기가 가득 퍼지는 것.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찻잎을 담았던 차기에서는 차향이 남는다는 말. 오도카니 인파 속에 홀로 앉아서 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기 좋았어. 지하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향기를 전해주고 있었지. 순간적으로 내 기분까지 다 환해지는 것 같았다니까. 건조기에서 막 꺼낸 옷을 입어본 적 있어? 따뜻한 포옹을 받는 기분이 들어. 귀여운 감상에 젖는 것이 이다지도 사소한 것들에서 오더라고. 눈 오기 전에 잔뜩 흐린 품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구름 같은 곳에서 말이야.


 또 있지,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여자애가 카페 아르바이트생한테 마침 주머니에 들어 있던 막대 사탕을 건넸는데 그 짧은 순간에 공간 한쪽에서 반딧불이 불빛처럼 반짝하는 수줍음의 기류가 귀여웠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을 때, 무심코 닿는 사탕을 기꺼이 건네고자 마음먹게 된 손님의 호의와 더불어서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접대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살짝 미소 지으며 두 손으로 자그마한, 제 손가락 마디보다도 작은 사탕을 받아드는 모습이 내 감상에 찰칵, 하고 남겨졌지.

 뭐, 그런 것들.


 그런 일상의 사소함이 내 감정의 표면을 쉽게 함락시키고는 한다는 얘기야. 아, 맞다. 이른 아침에 옆집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식기를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도 좋아. 뭔가 다정하게 느껴져서 그런가 봐.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우리는 오랜 이야기를 냅킨에 접어 두고 나란히 카페를 나섰다. 나는 카페 계단에서 괜스레 신발 앞코를 통통 굴리며 소리를 내어본 다음 우산을 펼쳤다. 그사이 친구는 저만치로 멀어졌지만 애써 따라잡기 위해 서두를 필요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가을에 내리는 비는 좋은 징조임이 틀림없다는 묘한 확신에 휩싸여 다시 거리의 인파 속에 파묻힌다. 앞으로 다가올 소소한 몰락을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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