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표면에 각인된 글을 당신이 해독해주기를 희망한다. (...) 내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사고를 형성하는 패턴들은 한때 나의 사고를 형성했던 패턴들을 복제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을 때, 그가 즐겨 찾는 카페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Some of these days라는 노래를 들으며 존재의 원초적 고독감을 잠시 망각할 수 있었던 그 순간을 절묘하게 묘사해놓은 구절을 읽을 때, 그가 묘사한 것과 꼭 같은, 시간이 마치 소용돌이치는 물처럼 부풀어 오르는 경험에 휘말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을 '우리의 초라한 시간을 벽에 대고 짓누르는' 듯한 격렬한 감정의 동요로 표현해 놓았었다.
그것은 그가 그다지도 싫어하는 거울 속에서 불이 붙은 공들이 굴러다니는 것, 담배 연기 고리들이 그 불공들을 둘러싸고 빙빙 돌면서 빛의 단단한 미소를 감추고 드러내기를 반복하는 것, 그 울렁이는 기묘한 황홀감의 한가운데 2021년에 존재하는 나의 패턴을 무턱대고 이끌어 들인 것과 같았다.
분위기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빠질 의도도 계획도 없던 21세기의 존재의 결심은 축축한 페이지를 한장 넘길 때 우수수 부질 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아. 그가 겪었던 사건과 장소들이 마치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예고도 없이 내 감정을 흠뻑 적시고 말아.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확신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낭만에 잔뜩 절여져 있다고. 그의 상념에는 달착지근한 맛이 감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나 순간, 여상하게 제자리에 놓여있는 탁자와 맥주잔 조차 그를 구토의 욕지기 한가운데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그가 종이 위에 꾹꾹 눌러 담았던 상념들과 광적인 발작들은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가?
바로 그가 존재하던 그 순간, 카페 랑데부 데 슈미노의 긴 가죽 의자, 음악으로 진동하는 그 빛의 방울 속이다.
문득 앞에 놓인 맥주잔을 가만히 응시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맥주잔을 꾹 누르고 있는 사르트르가 있는 것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작가가 남기는 것은 과거의 패턴이다. 그 뚜껑에 과감히 손을 뻗어 열어 보는 이를 그가 있던 장면 속으로 초대하는 공기 흐름의 패턴. 우리는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앉아 침묵을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