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힘든 법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체의 죽음은 산 자를 허무와 슬픔의 감정 속으로 욱여넣어 버리고는 하니까.
"이렇게 죽기는 억울하대."
모순적인 말이었다. 나는 내 두 귀로 듣고도 엄마가 금방 내뱉은 말을 믿기 어려웠다.
"지난 70여 년 간 내내 고단한 생을 보내지 않으셨어? 오히려 나 같으면 (바투 다가온 삶의 마감의 순간이) 달가울 거 같은데."
엄마의 표정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어쩌면 내 말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튀어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정으로 큰 이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내 고생만 하던 지난 삶이 아니었나? 두 다리마저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작금에 와서는 하루 종일 낡아버린 신체에 갇힌 채 더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원망과 희망을 더 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설혹 품는다 한 들, 무엇이 바뀐다고. 현실로 맺혀지지도 못할 것들 앞에서.
삶이 절멸하는 순간 앞에 선 인간은 누구든 갑작스러운 애착을 느끼게 되는 법일까?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버리고 갈 것조차 없는 가난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머릿속처럼 무거웠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냥 다 억울해'라는 표피적인 표현 말고, 급작스레 발동한 삶을 향한 애착과 억울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살아야 하는 일체의 근원적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삶은 이어진다. 타성과 관성에 의존하여 이어진다. 어쩌면 관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살아왔던 이들은, 육체의 타성에 이끌려 삶을 '살아가게 된'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육체의 본능적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상황, 연극이 펼쳐지던 무대에 무거운 휘장이 내려오는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 배우의 입장에서, 말 그대로 육체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삶에 대한 의욕'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간의 육체는 삶을 향해 약동하고, 정신은 실존과 그 부조리 앞에 머뭇거린다. 육체의 타성에 젖은 인간은 전자를 따라 감정을 견인당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애착 속에는 이 세상의 온갖 비참보다도 더욱 강렬한 그 무엇이 있는 법이다'
더욱 강렬한 그 무엇은 더 살아 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작가 이상의 '날개' 속에서도 데파트먼트 빌딩 위에선 주인공은 떨어지기 전, 날갯죽지를 열심히 움직이며 '훨훨 날아보자꾸나, 다시 한번 더 훨훨 날아보자꾸나'라며,
다시,
제대로,
한번 더,
살아보고자 하는 비장함을 내비치지 않았던가.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어둠이 깔린 저녁 무렵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내가 그리 모진 말을 내뱉고, 건조해 보일 정도로 근원적인 이유를 찾아 헤집었던 것은, 슬픔을 중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체시키지 않고는 몰려오는 두려움과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큰 이모,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잖아요.
우리가 다시 제대로 살아 볼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어요.
뒤를 돌아보면, 비틀비틀 거리며 끌려온 바퀴 자국만 진창 위로 길게 이어져 있을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