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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Nov 01. 2020

호시절好時節


수영을 마치고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유에 빨대를 꽂아서 한 손에는 수영가방, 다른 손에는 우산과 두유를 들고 숲 옆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늦여름의 오후는 곧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촉촉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빗속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자전거 탄 아저씨 뒤를 쫓아 종종걸음으로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아저씨는 중간중간 멈춰서 휘파람을 불며 강아지가 잘 뒤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법당에서는 목탁 소리와 법문 읽는 소리가 들렸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 속 등장인물들이 떠올렸다. 최서희가 잠겨 있던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 김길상이 최 판서 댁 종이 되기 위해 산사를 등졌던 모습. 또 우면동 이층집에 살던 시절의 내 모습도 같이 떠올랐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층 베란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터울 많은 사촌언니들 사이에서 막내처럼 자란 아이는 이제 성인 되었다. 그사이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서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뜨거운 국을 후후 불어가며 밥숟갈을 뜨던 사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제각기 파편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이제 두 번 다시 한자리에 모이지 못할 것이라며 빗줄기 사이의 바람이 내게 속삭인다. 서로 참 멀리도 갔구나. 나는 가만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한다.


이 계절이 몇 번이나 돌고 또 돌았을까? 다시 여름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8월이 왔다. 늘 그렇듯 비에 젖은 흙내음을 몰고 돌아왔다. 푸른 녹음 위로 하얀 실 빗금을 긋는 계절이 돌아와 내게 묻는다. 너의 이번 여름은 어떻냐고. 지난여름으로부터의 안부 인사다.


너는 잘 지내니?

너무 슬퍼하고 우울해하며 좋은 시절을 하릴없이 흘려보내지 말렴. 호시절. 좋은 시간이란다. 너의 젊음을 축복한다. 무르익어가는 계절을 살아라. 현재를 살고, 후회는 조금만. 기대도 덜. 다만 현재의 감각은 최대한 오래, 오래 음미하렴. 적게 두려워하고 더 자주 도전하는 삶을 이어가렴. 새들은 날개가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빗속에서도 훨훨 날갯짓을 한단다. 바로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가끔 안정감이 그립겠지만, 너는 언제나 새로운 자극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매사에 쉽게 지루해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너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보다 북극곰 옆에서 수영하는 게 더 체질에 맞는 인간이야(괜히 옆에서 깔짝거리다가 잡아 먹힐 지라도).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종종 충동적으로 행동할 거라는 것도, 비가 오는 날은 여행이 취소되는 날이 아니라 수영하기에 완벽한 날씨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두 발로 선 토끼가 ‘바쁘다, 바뻐’라고 중얼거리며 뛰어 가는 장면을 보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간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던 일을 다 뒤로 내팽개치고 곧장 토끼 뒤꽁무니를 쫓아 가버릴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기를.


무엇보다, 자유로운 네 모습이 내겐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을, 부디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kaerusen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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