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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rain D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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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Nov 22. 2020

혼자 사는 삶의 진정한 장점

(반박 안 받음)


이성애적, 동성애적, 범 성애적 연인 관계는 다분히 역할극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는 지난번 책(연애하지 않을 권리)에서 세세하게 다룬 적 있다. 흔히 연애의 종착지라고 알고 있는 결혼 역시 그 역할극의 확장 선에 놓인다. 아내가 되고 나면 사적인 영역인 가정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감정적 생체적 기대 역할이 추가 되는데, 제2세대 재생산의 의무를 띄는 몸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그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남성(남편)의 감정적 위안과 쾌락 제공의 노동 역시 의무감을 가지고 떠맡게 되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이러한 기대 역할은 비단 성 역할이 극명하게 나뉘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딸로, 동생의 누나이자 언니로, 또는 오빠 언니의 동생으로 혹은 장녀로, 또는 막내로 부여된 기대 역할도 존재한다. 여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 딸로서의 역할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K-장녀, 차녀 혹은 막내들은 모두 경험해봤을 것이다. 감정이 쓰레기통이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말이다. 우울증 소인을 가진 엄마 밑에서 자란 딸들이 그 소인을 그대로 물려받을 확률이 90%가 넘어가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물론 여기에는 유전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딸자식에게 자의식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전부터 가족이란 집단 안에서 아내이자 엄마로 역할 수행을 하며 겪었던 감정적 억압과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엄마의 영향이 어찌 없으리오.


혼자 살아서 가장 좋은 점은 나에게 바라는 기대 역할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잘 먹여주고, 씻겨주고, 재워주면 나는 대체로 나에게 만족해 하는 편이다. ‘너는 딸이 되가지고…’, ‘너는 누나가 되가지고….’, ‘너는 그 나이를 먹고도….’ 이런 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왜 가족끼리 떨어져 살면 더 사이가 돈독해진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의 감정이 태도가 되는 순간을 적절히 모면할 수 있어서 좋고, 잔소리 안 들어서 좋다.

며칠 전에는 인터넷에서 ‘가스라이팅의 대표적인 예시 25구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순간적으로 가족들의 목소리가 동시 재생 되어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진짜?”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네가 잘못 이해한거야.”

“넌 왜 내가 해준 건 생각을 못하고 안 해준 것만 생각해?”

“자꾸 과거(옛날 일) 얘기하지 마.”

“난 화낸 게 아니야.”

“너는 농담도 구분을 못하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알았어 이제부터 너한테는 아예 말을 안하면 되겠네. 그러면 되지?”  


저렇게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죄책감을 심어주는 표현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상황이 이미 익숙해져서였고, ‘이런 얘기를 가족이니까 할 수 있지’라는 친밀성의 전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당연함에 속아 망각하고 있던 것은 과도한 물리적-심리적 근접성은(가까움은) 정신적-언어적 폭력을 친밀함으로 위장해 정당화시키곤 한다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자신에게 완전히 귀속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피부의 오래된 각질처럼 둔각을 앓고 딱딱해진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존재, 나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일 없는 존재, 그러므로 내가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는 존재가 된다.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당연’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의 지각과 감각을 회복한다. 인간관계란 대부분 그렇다. 이러한 둔 각화 현상이 가족 사이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이제 나는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 내재한 폭력적인 상황들을 완전하게 벗어나 있다. 툭하면 “그럴 거면 집에서 나가”라는 말도 안 들어도 된다(이미 나가 있음으로). 그게 편하다. 다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금세 편안함에 적응하고 과거의 기억을 미화시키며 조금씩 부식 시켜 덜어냈을 뿐이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타인이 존재하는 한 그와 맺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역할을 하나씩 지정받아야 한다. 친구 관계, 연인관계도 그렇고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인간의 감정 및 육체적 에너지는 한정 자원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나는 굉장히 게으른 인간이라는 점.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하게 살려고 노력해봤으나 그냥 게으른 템포에 맞춰 살기로 결정을 내릴 만큼 게으르다. 그래서 할당 역할을 늘리는 대신 ‘나에게 잘하자’는 역할을 우선 수행하며 살고자 한다. 조금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선택과 집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멀티플레이를 하기에는 나의 체력과 인내심의 풀이 그리 넓지 못하다. 괜히 어쭙잖게 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 아니면 도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잘 챙기고, 우리 집고양이 잘 모시자. 그게 우선이다! 아니,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고양이가 먼저다! 그 밖에 것들은 악마나 물어가라지! 주인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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