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어떠한 대상을 지칭할 때 반복적으로 붙는 고유 수식어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 아폴론 앞에는 '멀리 쏘는'이라는 표현을, 전쟁의 여신 아테네 앞에는 '아이기아스를 가진'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식이다. 신족과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인간을 칭할 때는 '불사(不死)', '영생(永生)'의 신과 대척점에 있는 조건인 '필멸(必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필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불완전함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선고받고 태어남으로 그가 경험하는 모든 척도와 결과들은 상대적으로 된다. 지구 탄생의 역사가 45억 년일진대, 그 광대한 시간 속에서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영원한' 업적을 남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찰나를 살아가지만, 그 찰나 속에서 인간은 상대적 영원을 체감하며 -혹은 착각하며- 눈송이처럼 머물다 녹아 버리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 지상에 세운 모든 것들-관념적이고, 물질적인- 역시 마찬가지로 불완전(=immortal)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인간 조건에 대해 형이상학적 접근법을 사용했던 카뮈는 종종 주인과 반항하는 노예의 예를 들고는 했다.
한쪽이 일시적으로 누리는 당당한 지위는 다른 쪽의 복종만큼이나 상대적이다.
주인이 노예들 위에 군림하며 당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까닭은 노예들이 그의 권능을 '상대적으로'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나보다' 더 많은 권리가 있다. 더 유능하다. 노예에게 주인의 조건들은 무한한 긍정의 대상이지 반항과 전복의 조건이 아니다. 그 때문에 노예는 주인에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노예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모든 노예가 주인의 권능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존재가 있기에 실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노예가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순간 주인의 긍정적 상대성은 말소되며, 복종해야 할 것이 아닌 필멸의 조건을 갖춘 반항의 대상이 된다. 긍정의 무게추를 주인이 아니라 노예 쪽에 두는 순간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항과 전복이 이루어 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