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rain Drai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Dec 14. 2020

실시간 현관 앞 영상 확인

작년 여름, 친구 E가 이태원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작년 여름, 친구 E가 이태원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서울로 상경하여 이대 근처에 있는 복층 원룸에서 지내다가 몇 년 만에 방 1개가 따로 달린 전세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E는 어머니가 여자 혼자 사는 집이 번화가 쪽에 인접해 있어 내내 치안을 걱정하셨다며 이 집을 못마땅해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괜찮은 전세 매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는 시기에 열심히 발품 손품 팔아가며 서울에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수 있는 공간을 찾은 것은 실로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친구들끼리 아직 가구가 들어오지 않은 빈집에 둘러앉아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앞으로 각자 더 잘돼서 다음번엔 전세 아닌 자가로 이사를 하자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이사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E가 이사한 뒤 며칠 뒤,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간밤에 난데없이 웬 낯선 사람이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고 가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처음엔 이사간 전 세입자의 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따로 연락을 취해본 결과 늦은 밤 시간에 기별도 없이 찾아올 사람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혹시 택배 시킨 거 있었어?”



“아아니이! 야, 안 그래도 이 집에 공동 현관이나 경비실 같은 데가 없잖아. 그래서 전 남자 세입자한테 택배는 어떻게 받았냐고 하니까 글쎄 뭐라는 줄 아나? 쿠팡 같은 데서 시킨 생필품은 그냥 현관문 앞에 놓고 가라 하고, 값나가는 물품들은 집 안에 들여놓고 가라고 집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카드라.”



“집 비밀번호? 현관문 키패드 말하는 거야?”



“어어.”



“와… 이건 진짜 남자 혼자사는 집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E에게 자기가 쓰던 세탁기며 냉장고를 싸게 넘기고 간 전 세입자는 바쁘다고 소문난 의류회사에 재직 중이었는데, 하루 중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예 그 지역 택배 담당자에게 집 비밀번호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건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단순히 타인에 대한 높은 기대치나 신뢰감의 문제가 아니라 ‘크게 걱정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마음 놓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택배 기사가 거의 남자인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혼자 사는 집의 비밀번호를 택배 요청 메시지란에 떡 하니 적어 놓고 ‘신발장 안쪽에 들여놓고 가주세요’라고 말하는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E가 이사한 건물에 ‘여자 혼자’ 이사 왔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인지 저번 새벽에는 아랫집 남자가 여자친구와 술이 잔뜩 취해 올라와서는 또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며 ‘옥상 문 좀 열어 달라’고 생떼를 부렸다고 했다. 친구의 집이 가장 위에 층이라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옆으로 그 옆으로 나 있었는데, 주인이 걸어 놓은 자물쇠를 친구더러 꼭두새벽 중에 열어달라 했다는 것이다. E가 응대하지 않자 술에 취한 남자와 여자는 육두문자까지 남발했고, 결국 경찰을 부른다고 하자 그제야 아래로 내려갔다.



“심지어는 벨튀도 몇 번 있었다.”



“나중에는 별….”



“전 세입자한테 다시 연락해서 물어보니까 자기가 살 때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더라.”



이사한 지 며칠 만에 날이 어두워지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까지 생긴 친구는 마침내 ADT 캡스홈을 현관문 앞에 설치하게 되었다. 월에 2만 원가량만 내면 실시간으로 현관문 앞 낯선 배회자 감지 및 알림을 받을 수 있고 24시간 출동 요청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는 보안 업체 서비스였다. 놀라운 사실은 친구가 CCTV를 달고 현관문 앞에 ‘CCTV 녹화 중’이라는 팻말을 대문짝만하게 붙여놓고 나자 이사 후 며칠간 겪었던 ‘문 두드림’ 현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여자 혼자 산다고 하면 보안 문제로 별의별 것들을 다 신경 써야 하잖아. 신발장에 남자 구두를 놓아야 한다느니, 택배 받을 때 쎄 보이는 남자 이름으로 수령인을 설정해야 한다느니(ex: 성두홍, 황필조, 조국관 등), 우편물은 최대한 받지 않기(이메일 수령 등으로 전환) 등… 이사 전에 걱정 많이 했는데 월 2만 원씩만 내면 그런 걱정 싹 가시더라.”



친구가 이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내 이사 차례가 왔다. 이사 다음 날 아침. 박스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앞집에서 막 나오던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남자는 오늘 이사 오셨나 봐요, 라고 물었다. ‘네.’라고 대답하는 사이 ‘혼자 오신 거예요?’ 라는 질문이 바로 따라붙었다. 선한 인상의 이웃을 보고도 단박에 ‘네.’라는 말이 나가지 않고 턱 걸려오는 것을 느꼈다. 왜 여자 혼자 사는 것은 되도록이면 ‘숨겨야 하는’ 비밀인 걸까?

E가 사는 집에 살았던 남자 세입자의 에피소드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친구에게 웃으면서 ‘어차피 들어와 봤자 훔쳐 갈 것도 없는데요.’라고 얘기했다고 했다. 훔쳐 갈 것. 남성 1인가구는 물건이 도둑맞을 걱정만 하면 되는구나. 여성들은 그보다 더한 것들,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걱정해야 하는 데.

이사 전 날 친구가 보내 준 ‘여자 혼자 살 때 팁’은 어쩌면 ‘생존 팁’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오전 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