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들보다 이미 죽은 이들이 더 복되다 하였으며, 그러나 그들 모두보다 태어난 적이 없는 이, 그리하여 태양 아래 범해진 사악한 일들을 보지 못한 이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전도서 4장 2~3절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아 버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내 두려움은 거기서 온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어쩌면 더 지독한 시련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내 불행과 내 고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낳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 에밀 시오랑 (루마니아 태생의 철학자 1911~1955)
얼마 전 인터넷에서 "나는 강제로 태어남을 당했다"라는 표현을 우연히 보고 박장대소한 적이 있었다. 이 세계에 태어나는 것, 그러니까 출생과 관련된 긍정적인 메시지만 흔하게 접해왔던 입장이기에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 같은 발칙한 발상에 아이러니의 웃음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글쓴이의 요지는, 내가 낳아 달라고 애걸복걸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신들만의 의견과 계획 하에 자신을 '생산' 했으면서 그에 대한 자발적인 고마운 감정과 존경을 바라는 것도 모자라 더 나아가 나중에는 본인들의 노후 보장까지 책임지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을 텍스트로 고상하게 표현해 놓은 것을 보고 싶다면 반출생주의(Antinatalism)의 철학 정립자 데이비드 베너타 남아공 케이프타운대 교수의 저작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2006)>를 참고하면 된다.
"출산은 보통 섹스하다 보니 나온 결과이지 사람을 존재하게 하려는 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정말 아이를 갖기로 하는 이들은 여러 이유에서 그런 결정을 할지 모르나, 그런 이유 가운데 잠재적 아이의 이익은 들어갈 수 없다."
실제로 부지불식간에 아이가 생겨서 계획에도 없던(혹은 더 뒤로 예정되어 있던) 결혼을 서두르는 경우도 왕왕 있지 않은가? 이런 이들에게 출산이란 고심의 결과라기보다 특정 행위로 빚어진 사건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진실로 다 타당하다.
그렇다면 번식 행위가 지고한 선(善)에 해당하는 행위이자 인류의 맥을 잇는 숭고한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까지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것일까?
문명 탄생 후 인간은 노동력 확보와 노령 인구 부양을 위한 인적 자원 차원에서 출산을 적극 장려했다. 국가적 차원의 노력의 여러가지 예들 중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시대에 마을에 혼인하지 못한 노총각이나 노처녀가 있으면 그 부모와 가문을 처벌하고 더 나아가 그 고을의 수령까지 문책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나,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출산 강제 정책ㅡ양육 인프라나 복지 제도의 확보 없이 단순히 일정 수 이상의 아이를 낳도록 강제한 것ㅡ을 실시한 것, 서구권 대다수 국가에서 아이를 낳을 때 출산 축하금을 주는 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라는 행성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이야기가 영 딴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바로 허무맹랑하다고 욕만 뒤지게 처먹던 이름도 유명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다 주목받는 양상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10억 명이던 인구가 20년 중반에 접어들자 23명으로 급격히 불어나며 식량 부족 문제등이 빚어지자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때 적극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중국은 1950년대 중국 학자 마인추가 인구통제 이론을 제시하며 1974년 '아이 한 명만 낳자'는 산아제한 정책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가 2016년 1월부터는 모든 가정 당 2명의 자녀를 허용한 상태이다. 한국 역시 1962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기치아래 산아제한 정책이 담긴 가족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6.25 전쟁 이후 인구 증가율이 치솟으며 미덕의 상징이었던 다산을 규제한 것이다.
그러나 인구 증가는 계속 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는 76억 명에 육박하며 1970년에 37억 명이던 인구가 약 40년 만에 2배 넘게 증가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과포화된 빈민가와 도시 공장들, 질병과 환경 오염, 주거 공간, 에너지 및 식량 부족 현상이 빚어지며 근래 번지고 있는 COVID-19가 지구의 마지막 백신이 아니냐는 말까지 항간에 떠돌게 되었다.
그러니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출산이란 상황에 따라 제한해야 하는 요소가 될 수도, 또 언제는 장려해야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절대 선(善) 혹은 인류의 덕목에 해당하는 항목이 결코 아닌 셈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를 용서해 줄래?"
시리아 내전을 취한 2019년 작 다큐멘터리 영화 <사마에게>에 나오는 대사이다. 필름 안에서 주인공은 친구이자 의사인 함자와 결혼하여 딸 사마를 낳고, 전장 속에 딸을 키우게 되는데 그런 가혹한 환경 속에 어린 개체를 타의 적으로 노출함에 대한 엄마의 미안함 그리고 이 세상을 아이들이 자라나기에 더 적합한 환경으로 개선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대사로 등장한다.
물론 이 지구촌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사마처럼 극단적인 환경에서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게도 미국 상류층 가정에서 XY 염색체를 물려받고 금발의 푸른 눈동자 그리고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도 있다. 두 아이의 출발점이 다른 만큼 극과 극으로 갈린 초년 시절을 보내게 되겠지만 아이의 안정적인 출발을 보장하는 것만으로 부모로서의 모든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정의 부모로서 아이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최고의 성장 환경을 제공한다 한들, 그 아이가 세상으로 나가 맞닥뜨리고 겪게 될 다양한 변수마저 통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 강간, 살인 등을 비롯한 각종 범죄와 질병, 불의의 사고 및 범죄 그리고 환경 오염으로 인해 야기되는 갖가지 이상 현상 및 온갖 마이너스적 변수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아이의 '청정 무균 상태'가 얼마나 침범당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을지 과연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바른 성정과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겠지만 최고의 방패를 선사한다고 하여 아이의 방패에 기스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비극 3대 작가 중 한 명인 소포클레스의 희곡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도 비슷한 맥락의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빨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차선적이라네. 청춘의 경박한 어리석음이 지나간들 어느 누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질투, 당쟁, 불화, 그리고 전쟁... 그 어느 누가 전쟁의 유혈과 전쟁의 비통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이가 싫어하는 노령이 찾아온다네. 힘도 없고 친구도 없는 노령이... 황혼에 의지할 곳도 없이 온갖 쓰라린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노령이.”
탄생의 신비와 출산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태어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의 캠페인뿐 아니라 수많은 철학과 문학, 영화가 그 변론을 충분히 대신하고 있으니 나까지 굳이 그 예를 더 들지 않겠다. 글의 무게를 맞춘다고 여기다 쥐어 짜내 써본다한들 어차피 분위기가 너무 멀리 왔잖아. 수습 불가다.
다만 내가 이 꼭지에서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출산이라는 것이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손을 겨냥하고 있기도 한, 총알이 꽉 차 있는 총으로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는 것”이라는 반출생주의적 입장도 한 번쯤 어떤 배경에 기인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합리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이런 상황에서 선택한 선택지는 ‘게임에서 손 떼기’였다. 무엇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를 때는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후대에게 자의든 타의든 어떤식으로든 상처 입히지 않을 자신도 없다. 그리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굳이 태어나게 할 만큼 이 세상이 꽃밭도 아니지 않은가. 아이만을 위한 청정 무균실을 만들기에는, 솔직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 나중에 <사마에게>에 나온 대사처럼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를 용서해 줄래?"라는 대사를 아이에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비출산’을 선택하는 바이다.
게다가 나 같은 경우 지구에 태어나서 그로부터 나는 자원을 착취하고 소모하는데 열심히 일조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돌려준 것이나 일말의 도움이 된 면도 없으므로 비출산이라도 해서 지구의 부담을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라도 줄이는 데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진심). 한 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에 수용가능한 인구 정원이 80억명이라는데, 그 임계치 도달까지 겨우 3~4억명 정도 남은 상태이지 않은가. 뿐인가? 부득불 내 책을 한권이라도 더 내야겠다고 지구의 소중한 나무를 베는 데까지 가담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비출산 다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의식있는 생명체로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