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긴가가 아니라 얼마나 훌륭하게 연기했는가가 중요하네
삶 또한 연극처럼 - 얼마나 긴가가 아니라 얼마나 훌륭하게 연기했는가가 중요하네. 어디쯤에서 끝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네. 자네가 끝내길 원할 때 끝을 내게. 다만 훌륭한 결말을 지어야 하네. 잘 지내게.
어느 책에선가 그런 구절을 읽었었다. 고독감과 외로움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동물은 인간 동물 human animal 밖에 없다고. 그래서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언제나 무언가에 취한 채였다.
누군가는 사랑에, 누군가는 술에, 또 누군가는 연민과 불행에... 가지각색의 이유로 모두 현실의 불안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이처럼 인간 동물은 우울감을 본성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극복하려 시도한다. 자신 안으로 침잠해야 하는 순간마저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고' '만지고' '소비하는' 등의 활동을 멈추지 못한다. 마비의 몰약을 마시고 둔감해지고 무기력해진 인간은 고요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 외면과 회피는 종국에는 복리처럼 늘어나 탕감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왕성한 활동의 추진력을 잃는 젊음이 지나고 난 뒤 고요와 적막에 휩싸이게 되는 노년에 가까워 올 수록 벗어날 수 없는 우울감에 더러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의 정치 철학자 존 그레이는 자신의 저서 <고양이 철학>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주로 회피 활동을 하는 데 쓰는, 자아가 분열된 생물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우리의 삶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달아나기란 즉, 인간 동물에게 필연적으로 혹은 원초적으로 부과된 명제를 부정하기에 발생하는 자기 분열 현상이다. 우리는 죽음과 노화를 인지하고 있기에 그를 부정하고자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의학에 매달린다. 현세에 얼마나 많은 자본과 인맥을 가지고 누렸든 결국 관 속에 들어갈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탐욕스럽게 살아가며,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영원의 맹세를 하는 식이다.
자기 기만의 동물, 인간.
인간 동물의 무의식은 이처럼 의도적으로 의식의 영역에서 '밀어낸'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런 부산물들은 내면의 어둠으로 꼭꼭 덮어버린다.
세네카는 자살에 대해 묻는 젊은 제자에게 서두와 같은 대답을 건넸다. 존속의 의미가 다 무엇인가? 길고 짧아 보았자 다 부질없는 견주 기일뿐. 훌륭한 연기는 훌륭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그 무대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는 내면의 어둠 속으로 침잠하여 우리의 그림자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경련과도 같은 거짓 과장된 밝음과 쾌활을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어둠을 탐미하라.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우리네의 삶을 훌륭하게 연기해 내는 유일한 방법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