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내가 낸 두 번째 에세이 제목도 '혼자서도 완전한'이었는데.
우리 세대에 리처드 도킨슨 같은 위대한 학자를 둔 것은 실로 고마워할 만한 일이다. 그가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을 써준 덕분에 '나란 인간은 도대체 왜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중2병 돋는 철학적인 질문 때문에 머리 싸맬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책은 꽤 냉정한 편이었다. 응, 중2병이고 나발이고 그딴 감수성 전혀 모르겠고-라는 뉘앙스로 시작해 젠틀한 존재론적인 까대기를 해대더니 종국에는 '짜잔- 사실 인간이란 유기체는 한낱 DNA 캐리어에 불과했습니다!'라고 코앞으로 현실을 들이 밀어주었으니까.
그래도 위안은 있었다. 수십 만년에 걸쳐 전승되어 온 선대의 DNA를 무사히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거지 같은 사명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뿐이 아니라 얘도, 쟤도, 이쪽도, 저쪽도, 철이도, 유리도 이미 관짝에 묻혀 원자로 돌아간 조상님부터 앞으로 태어날 무수한 생명체들까지 모두 같은 미션을 가지고 태어난 동지였다.
게다가 다분히 인간적인 요소들이라 생각했던 사랑, 희생, 공포 같은 감정들도 그저 유전자의 생존 및 번식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프로그래밍된 결과일 뿐이라니. 이때 문득 떠오른 건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허망하다! 이런저런 인간적인 감정에 얽매어 무엇하나? 집착해 무엇하리오? 어차피 다 아무 의미도 없는 한낱 신기루와 같은 환영에 불과한 것을. 인간 사에 울고 웃는 게 꼭 호숫가에 뜬 달을 건져보겠다고 맨 몸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는 꼴이로구나.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꽉 닫힌 절망으로 끝맺음되진 않는다. 작가는 외려 "우리에겐 우리의 창조자(유전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유전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며 나름 희망적인 열린 결말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절망이면 절망이고 희망면 희망이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하게 열린 결말... 이거 뭐야....?
이렇듯 다소 찜찜하게 끝난 청소년 권장 도서 독서 편. 우울해해야 하나 아니면 용기 백배해야 하나. 방향성을 잃은 채 독후감 비스름한 걸 쓰고 끝냈던 기억.
그 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나는 선대 DNA 캐리어라는 사명을 저버린 채 한 해 한 해 유기체의 노후화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고, 이 짓 저짓 다 해보고 실패란 실패는 다 겪어 보다가 문득 학창 시절에 덮어 놓았던 그 존재론적 문제를 다시 되새김하게 되는데.
'tlqkf... 도대체 난 왜 처 자빠져 살고 있는 걸까? 왜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뭔가 해보겠다며, 뭔가 되겠다고 오만 난리를 다 치는 거야.'
근원적인 무력감과 초조함 앞에 오만 가설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대단한 건 아니고 살아오면서 여기저기서 잡다하게 주워들은 남의 말들이었다. 생각을 거르고 거르다 보니 슬슬 문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걸려 헤매던 덫, 이름 하야 '자아실현 욕구'였다.
한 개인의 인생에서 생존과 번식 외에 그럴싸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
모든 역경과 억압에 맞서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우겠다는 반항심!
지적, 감정적, 감각적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고 싶다는 욕망!
리처드 도킨스 님, 매슬로우 님, 프리드리히 니체 님, 알베르 카뮈 님 기타 등등 저명하신 천재 학자님들 이거 맞죠?
여기서 잠깐.
나는 왜 실패했지?
내가 게을렀나?
사실 시도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왜냐면 난 쉬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 냈으니까. 그게 에세이든, 웹소설이든, 옷이든, 유튜브 채널 콘텐츠든 간에. 그러니까 '하면 된다!'에서 '하는 행위' 자체는 성실하게 담당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결국은 그 행위로 인한 결과물이 실패했다는 소리인데-. 이 실패의 기준이 어디서 오는고 하고 보았더니 다름 아닌 외부 세계 타자들의 인정이었다.
결론은 깔끔하고 잔인했다.
나는 실패했다.
정확히는 내가 만든 콘텐츠들이 ‘시장성’과 ‘인기’라는 외부의 잣대 앞에 번번이 무너진 것이다. 이로 인한 낙담과 좌절감은 내가 창작의 과정 자체에서 느끼는 기쁨마저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시시프스는 위대한 인간이다. 그는 박수 소리 없이도 묵묵히 돌을 밀어 올리니까. 반면에 나란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아아, 카뮈는 왜 말해주지 않았던가. 반항하는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반항이라는 행위조차 나의 반항을 지켜볼, 혹은 내가 맞서 싸우고 그 투쟁을 인정받을 타자와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다고 말이다. 무인도에서 홀로 외치는 반항은 그저 공허한 소음에 불과하고, 자아실현은 한 인간이 케케묵은 일기장 속에서 발현되지 않는다고.
나는 나의 자아실현을 지켜봐 줄 증인이 필요했다. 왜? 그래야 일당이 나오니까. 막노동 판에서 임금 없이 벽돌 나르는 인부를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벽돌을 나르는 행위 그 자체에서 어떤 모종의 숭고한 의미를 발견하면서? 그건 신화에 다름이 없다. 현실은 때로 신화보다 냉혹한 법이다. 먹고살아야 어디서 의미라도 찾을 것 아닌가.
난 좌절했다. 분명 내가 낸 두 번째 에세이 부 제목이 '혼자서도 완전한'이었는데. 먹고사니즘 앞에서 그 마저도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혼자서도 완전한' 경지를 꿈꾸며 버둥댄 나의 모든 몸부림이 실은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세상의 인정을 갈구하는 행위였다는 이 끔찍한 모순이라니.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게 공명정대한 진리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내가 도달한 정거장에 뜬 입간판에는 그리 쓰여 있다. 경제적 맥락, 정치적 맥락, 사회적 맥락 그 모든 맥락에서 나는 절대 홀로 완전할 수 없었다. 그 바탕이 생물학적 본능이든 사회화 과정의 산물이든, 문화적 산물이든 뭐든 간에.
그럼 나는 왜 지금도 글을 쓰고 있을까? 글 한 자 더 쓴다고 내 존재가 더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더욱 긴밀히 연결되는 것도 아닐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또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와 맞물린다. 나를 좌절시켰던 바로 그 욕구가 나를 또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적 불안은 나를 무어라도 하게 만들고, 내 존재와 생각을 증명하고 싶게 만들고, 나는 이것이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듯 꼭 부여잡은 채 상념을 나열하고 있다.
그래도 글쓰기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나를 격리시키지 않을 소통의 창구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더 큰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야트막한 희망을 놓지 않은 채로.
통재라! 유전자 캐리어보다는 더 나은 뭔가가 되어 보겠다는, 다분히 인간적인 집념을 아직도 놓지 못했구나! 에잉, 쯧쯔.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호수에 뜬 달이 저리도 탐스러워 보이는 것을.
달을 건져 보겠다 허우적대다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기어코 제 두 발로 걸어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데.
아, 그 놈의 달 참 예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