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무신경함'에 대하여
"그냥 너는 생각이 너무 많은 거 같아."
탁.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테이블 위로 아메리카노 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내 인생 모든 문제의 알파이자 오메가를 관통한 현자처럼. 그 시선엔 '네가 그렇지 뭐'라는 해묵은 권태로움이 살짝 묻어 있었다. 아. 적어도 5분을 떠들었는데. 진단이 이렇게 간단히 내려져도 되는 건가.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개피곤해."
내 대답에 친구가 헛웃음을 짓는다. 안 그러고 배기냐는 듯.
"나 어떻게 하냐."
"생각을 좀 꺼봐."
친구의 답에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야이씨, 장난하냐.
그게 가능하면 진작에 셧다운 버튼을 눌렀겠지.
자기 일 아니라고 저렇게 간단하게 얘기하는 거 봐.
친구의 심플한 해결책과 달리 내 뇌는 24시간 불을 밝힌 편의점에 가까웠다.
그거 알아?
나는 자면서도 생각을 해.
현실보다 생생한 꿈을 꾸고, 그 꿈 안에서도 또 다른 생각을 시작해.
겹겹의 상상.
끝도 없이 늘어나는 미로.
웅웅웅...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연소되는 회로.
어쨌든 친구는 내 '생각 과잉'이 인생 모든 비효율의 근원이라 진단했다. 엉뚱한 상상할 시간에 차라리 인생에 도움 되는 생각이나 하라면서.
한 마디로 뾰족한 해결책이 도출되는 사안에만 에너지를 쏟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쭈절쭈절 항변을 하자니 좀 없어 보이기도 하고, 게다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친구 말대로 나는 정말 엉뚱한 것들에 주의가 흐트러지곤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벽을 바라보면 타일 무늬가, 얼룩이 이리저리 뭉치고 흩어지며 순식간에 로르샤흐 테스트로 변한다.
'이게 뭐처럼 보이 시나요?'
음, 오늘은 벽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는 코알라 무늬가 보이는 것 같아요. 저번에는 날개 한쪽이 꺾인 천사 모양을 찾았던 것 같은데.
지하철에서 스친 누군가의 옆모습. 피로에 절어 퀭한 눈과 채 마르지 않은 축축한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현대 직장인의 애환과 피로 사회'에 대한 단상 한 편이 머릿속으로 촤르르 지나가고.
골목길을 걷다 우연히 들은, 창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 이른 아침의 적요를 깨는 소음 속에서 홀로 아침을 맞는 어느 독거인을 상상하다가 인간의 실존적 고독에 대해 생각하는 식이다.
"도대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생각이 뭔데?"
내 질문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모범 답안을 읊었다.
“다음 달 카드값은 어떻게 막을지, 커리어는 어떻게 할지, 주식이라던지 부동산 투자라던지... 하다못해 주말에 장 볼 목록이라도 짜놓는 거. 그런 게 최소한 벽에서 코뿔소 찾는 것보단 생산적이지 않겠냐?”
한 마디로 고민하면 해결되는 효율적인 문제들에만 몰두하는 실용주의자가 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엉뚱한 대답만 내놓는다.
"안 찾았어. 보인 거지. 그리고 코뿔소 아니고 코알라였어."
"....."
이어지는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
"넌 좀 대가리 꽃밭이 될 필요가 있다니까."
친구의 농담 같은 조언에 문득 철학자 셸러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종의 정신적 스위치를 내린다던가. 사물의 본질이나 삶의 깊이를 파고드는 대신, 그 표면만 쓱 훑고 지나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 이 얕게 생각하기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고도의 생존 전략이다. 셸러는 이를 멋지게 '형이상학적 태평함'이라고 불렀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가리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것부터 실패한 인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뇌는 다른 시공간을 배회하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사유로는 절대 해결 불가능한 우주의 근본적 미스터리와 타인의 속마음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있지, 나도 이따금 감정적 식물인간이 되고 싶어."
현대 사회에서 성공한 소위 엘리트들처럼. 감정을, 생각을, 단 1g도 허투루 소비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낙관주의인지 선별적 무신경함인지, 아무튼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 덕분에 세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수고를 면제받은 자들.
엘리트까지 될 수 없더라도 그냥 무던한 평범함을 지니면 어떨까, 바라기도 해. 넷플릭스 시리즈 다음 시즌을 재생하고, 인스타그램 릴스를 스크롤하며, 죽음이라든지 우주라든지 삶의 부조리 같은 골치 아픈 문제엔 단 1g도 생각을 낭비하지 않는 극한의 효율주의자들처럼.
반면 나는 어떤가.
나의 뇌는 빅토르 위고가 묘사한 노트르담 재판소 광장과 다를 바가 없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온갖 자극들이 내 뇌라는 광장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든다. 시시각각 새로운 감각의 물살이 밀려들어, 의식의 모퉁이 여기저기에서 출렁이며 부딪친다.
고함소리, 웃음소리, 수천 명의 발소리가 뒤엉켜 엄청난 소음과 혼잡을 불러일으키는데, 질서를 바로잡을 치안행정관 따위는 부재중인 채로.
가보르 마테 박사는 이런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겠지. "전형적인 성인 ADHD 증상입니다."
차갑다.
냉정해.
온기 한 점 없는 수술대 위에 맨 몸으로 올려져 있는 것 같다고.
그래, 나는 ADHD 환자일지도 모른다. 생각 과잉이며, 감정 과잉이다. 친구가 권한 대가리 꽃밭 프로젝트는 언제 이뤄질지 묘연한 상태다. 꽃밭은커녕 꽃 한 송이조차 제대로 틔워내지 못할지도 몰라.
왜냐하면 나는 오늘도 길을 걷다 누군가의 인생을 소네트로 만들고, 내일은 그루터기 앞에서 나무의 첫 뿌리 내림과 그 아래 드리워졌던 그림자를 상상할 테니까.
어쨌건 나는 오늘도 무감각해지는 데 실패했다.
아마 평생 실패할지도.
그래도 괜찮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글쎄요, 이젠 어쩔 수 없잖아요.
이렇게 체념조로 얘기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게 아니라, 세상이 너무 건조한 거 아니에요?'라고 꿍얼거릴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가 고장 났을지 몰라도,
어차피 이 세상도 멀쩡하지는 않으니까.
다들 멀쩡한 얼굴로 버티고 있을 뿐.
오히려 나처럼 무너지는 게 오히려 더 인간다운 건지도 모르잖아?
이 삭막한 우주에서.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속절 없이.
무
너
져
내
리
는
것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