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에도 유튜브 프리미엄 같은 결제 기능이 있을까?

인간의 불안이 신앙의 근원이라는 시각에 대한 단상

by Ellie


고백하건대, 나는 지독히도 간사한 인간이다. 평소엔 안중에도 없다가, '좆됐다'는 직감이 강렬하게 들 때면 그제야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떠올린다.

이 절대적 존재가 특정 종교에 국한된 건 아니다. 딴엔 효율적으로 굴린답시고, 한 큐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이란 신은 다 찾아 부르짖는다.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가 애매할 때는 '우주의 기운'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어쨌든 뭔가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거 나만 그런 건가. 어쨌든 난 위기의 순간에만 신을 찾는 벼락치기 신앙인이다. 특정 종교도 없이 그저 막연하고 가련한 신도 코스프레를 하는 거다.


'네 롯데로 하세요'가 된 것 같을 때만 신성을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빈도수로 따지자면 불안감을 느낄 때 더 자주 초월적인 존재를 찾는다. 닥쳐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불확실성 때문에.

아아, 왜 우리네 인생엔 유튜브 프리미엄 같은 '구독 결제 기능'이 없는 것일까.

월 11,900원이면 2160p 고화질을 선사하는 유튜브와 달리, 우리 인생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144p짜리는 커녕 어두컴컴한 미래 밖에 안 보인다. 젠장, 젠장, 젠장. 이럴 때면 으레 그렇듯 우주/신/초월적 에너지를 찾고 보는 것이다. 마치 그 존재가 내 인생의 2160p 옵션을 켜주기라도 할 것처럼.




다행히 나만 이런 불안을 느끼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따금 여행지에서 종교적 명소나 성지에 들를 때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숱한 불안의 현현을 목격하곤 하니까. 그게 뭐냐고? 바로 기도문과 축원 조성물 같은 것들이다. 몇 주 전인가? 한 사찰의 대웅전 천장을 올려다보다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신도들의 이름과 출생연도가 빼곡히 적힌 그 수많은 연등들을 보고서.

연등 하나에 3만 원, 5만 원, 소불상 조성에 100만 원, 200만 원. 축원문과 기도문에도 또 얼마...

이 모든 돈의 정체는 결국 하나다. 불안에 대한 선결제, 즉 미래라는 불투명한 상품에 대한 '프리미엄 구독료'인 셈이다.


신앙은 행동 규범, 설명서, 사용법을 제공한다. 뭐가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우리에게 잘 짜여진 매뉴얼을 건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왜 여기 있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뿐인가? 친절하게 행동 지침과 규범도 알려준다.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더불어 기도나 명상, 보시, 십일조, 신앙고백, 기도, 자선, 단식, 성지순례 등등 각 종교별로 구체적인 실천법까지 제공하니, 얼마나 고마울 일인가. 미래가 144p는커녕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마당에 별안간 하늘에 나타난 북극성처럼 나침반이자 지도, 목적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주다니!




사실 '신앙은 인간의 불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어제오늘 거론되는 화두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종교 비평가들이 닳고 마르도록 이 주제에 대해 떠들어댔으니까.


우선 덴마크의 우울한 천재 키르케고르. 그는 절망이란 인간이라면 출생과 함께 달고 다오는 '패시브 스킬'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실존 자체가 깊은 불안과 절망을 안고 태어난다고 본 것이다. 그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는 이 절망을 '정신의 병'이라며 쐐기를 박는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죽는다는 이 필연적인 한계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을 느끼게 되어있다고. 때문에 인간은 이 선천적인 불안을 극복하고자 신앙으로 도약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모든 합리적 설명을 초월하는 존재에게 dive in! 결국 인간의 절망감이야 말로 신을 찾게 만드는 동기 부여인 셈이라고 본 것.


이와 비슷하게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인간 존재 자체가 불안의 원천'이라 명명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안이라는 기본 앱이 깔린 스마트폰 같다는 소리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환상의 미래』에서 종교를 인간의 심리적 욕구에서 비롯된 '집단적 환상'으로 치부했다. 인간은 어릴 적 부모에게서 보호받고 의지했던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신에게 투사한다는 것이다. 무력한 어린아이가 무섭거나 불안할 때 부모에게 매달리듯, 성인이 된 후에는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 질병, 죽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전지전능한 신을 찾는다는 거라고.


더 나아가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향해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설을 날린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신성한 믿음을 싸구려 진통제 전락시키는 클라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명확했다. 공장에서 피땀 흘리는 노동자들이 겪는 지독한 착취와 소외. 그 불안과 고통을 잠재우는 심리적 해소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의 고난은 전생의 업보를 씻는 과정이다."

"심령이(humble in spirit)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부를 쌓는 중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인가.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싸구려 환상'이 혁명의 의지를 마비시킨다고. 신의 전능함에 취해 현실의 아픔을 잊는 동안, 사회의 착취 시스템은 공고히 유지된다고 본 것이다.




자, 이제 카메라를 돌려 이 모든 생각의 진원지, 바로 '나'라는 간사한 벼락치기 신앙인에게 앵글을 맞춰보자. 그녀는 대뜸 왜 인간의 미래는 불안한 것이냐며, 왜 내 미래는 고화질이 아니냐며 따지다가 자신을 간헐적 신도로 만드는 종교란 대체 무엇이며 그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며 삼천포로 빠졌다.


그리고 긴긴 상념 끝에 얻은 결론.


우리 인간은 망망대해에 던져진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때문에 영원히 불안이라는 멀미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붙잡으려 하고 기대려 한다는 것. 그것이 신의 굳건한 약속이든, 갓생을 보장하는 시간 관리법이든, 심리 테스트든, 사주나 별자리 점성술 따위든, 뭐든 간에. 미래라는 불투명한 관념에 대한 화질을 높여 줄 무엇이든 절실한 것이라고.




어쨌든 나는 또 실패했다.

어떤 것에?

특정 종교의 신실한 신도가 되는 일에.

그리고 불안을 명확히 명명하고 그를 극복하는 일에.


우주여, 이 나약한 인간의 얼음장처럼 얇디얇은 믿음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냥 이 어린 양을/ 나약한 중생을/ 기타 등등을 품어주시면 안 되나요?


기도는... 간간히 생각날 때마다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대인배처럼 쿨하게 넘어가 주실거죠?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1화혹시 지금 괴로우신가요? 삐빅! 당신은 정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