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탈출 편 (1)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시작부터 HELL 모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애 작가 중 하나인 앙리 라보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폭력들이 만연해 있다고.
이 고급진 메뉴판을 살짝 들춰보자면 첫 장부터 다채롭기 그지없다.
언론과 사회가 정성스레 빚어낸 고정관념 — 고급진 표현으로는 ‘매스미디어와 문화적 자동성’ — 에 뇌가 절여진 좀비들이 ‘다수의 의견’이라는 명목으로 휘두르는 폭력, 약자에 대한 당연한 혐오와 차별, 여기에 ‘전통과 권위’라는, 나프탈렌 냄새 풀풀 풍기는 구닥다리 기조를 앞세운 기득권층의 폭력도 빼놓을 수 없지. 참고로 이건 예수도 당한, 최소 2천 년은 된 스테디셀러이자 클래식 메뉴란다.
스페셜 메뉴로는 가해자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며 시전하는 피해자 코스프레가 있겠다.
이게 전부냐고? 당연히 아니지. 리스트는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굳이 다 소개하면 스트레스 때문에 만성 역류성 식도염이 도질 것 같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느냐. 물론 이런 상황 자체로도 좆같지만, 그보다 한층 더 좆같은 사안,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토로하고 싶어서다.
요즘 표현으로는 ‘긁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현실에 억울함을 느껴서.
그렇다. 이쯤 눈치챘겠지만, 나는 불행히도(다행히도?) 전자에 속한다.
세상의 미세한 톱니바퀴에 늘 긁히는 사람.
요즘은 이런 사람들을 ‘초민감자(HSP: 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들쑥날쑥한 감정의 가시를 안고 사는 사람에겐 좀 과분한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초민감자들(이하 ‘우리’는) 세상과 일상에 만연한 폭력을 둔감하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마치 그런 미세한 폭력들 — 당연함이라는 이름의 차별, 정상이라는 탈을 쓴 혐오, 선의로 포장된 가스라이팅까지 — 을 집요하게 수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 여기서 잠깐. 우리라고 다 같은 우리는 아니다. 초민감자들은 세상이라는 게임을 하드(HARD) 모드로 시작하지만... 여기에 '대한민국', '여성', 그리고 '장녀'라는 설정까지 더해지면?
귀를 기울여 보라. 튜토리얼 시작 BGM이 들리는가?
"딸이니까",
"여자가~",
"너는 누나가 되어서~"
이쯤, 띠링!
귓가에서 들리는 익숙한 알림음.
<SYSTEM>
헬(HELL) 모드가 적용되었습니다.
[디버프 적용]
- 「과민성 감각 증폭」 패시브가 적용되었습니다. (모든 자극 200% 증폭)
- 「유리멘탈」 패시브가 적용되었습니다. (정신력 회복속도 -80%)
- 「장녀」 저주가 발동되었습니다. (책임감 +300%, 자유도 -90%)
[추가 페널티]
- 「가스라이팅 취약」 상태이상에 걸렸습니다.
- 「공감 과부하」 스킬이 강제 활성화되었습니다.
- 「눈치 100단」 패시브로 인해 정신력 지속 소모
- 「예민충」 낙인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사회적 평판 -50%)
[히든 디버프]
- 「태생적 죄책감」 영구 적용
- 「완벽주의 강박」 해제 불가
- 「거절 불가」 스킬 잠금
**TIP: 다른 플레이어와의 공감대 형성 시 일시적 버프 효과가 있습니다.**
**TIP: "정신과 상담" 정기 사용으로 HELL 모드 생존율이 소폭 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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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SIBAAAAAAAAAAAAAAAAAA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