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착취 사회의 희생양, 정신적 마조히즘에 관하여
사실,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아무래도 중증 ‘갓생 증후군’ 환자인 것 같다.
내 증상은 대게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쉬는 날에도 늦잠을 자지 못한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면 기분이 매우 좋지 않고, 하루를 통으로 날려버린 것 같은 패배감에 휩싸인다.
주 3회 이상 헬스장 출석은 의무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근손실보다 먼저 죄책감이 찾아온다.
끊임없이 새로운 취미와 자기 계발 거리를 찾아 헤맨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는 내가 불안해서.
모처럼 켠 유튜브/넷플리스/OTT 화면이 잠시 검게 바뀔 때, 그 위에 비친 내 멍한 표정을 보는 순간, 진한 현타가 밀려온다.
기타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ex: 게임 등)에 일정 시간 이상 쏟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왁자지껄한 모임이 파하고 나면 역시 왜인지 모를 허탈함이 느껴진다. 도대체 이건 뭘 위한 모임이었지?
뭔가 항상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은은한 압박감을 느낀다.
이 섬뜩한 자화상에 당신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발적 자기 착취’라는 병동에 입원한 동지이자, 이 자본주의 한국 지부 산하 ‘정신적 마조히스트 양성소’가 길러낸 가장 충실한 엘리트 중 하나라는 뜻이다.
환영한다.
삶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나라에 온 것을.
이쯤, 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고작 몇 가지 증상에 공감했을 뿐인데, 그냥 남들처럼 부지런 좀 떨었을 뿐인데, 왜 갑자기 ‘정신적 마조히스트’라는 딱지를 붙여 ‘자기 착취’에 찌든 인간으로 만드냐고.
걱정 마시라.
지금부터 당신이 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완벽한 시스템의 부품이 되었는지, 그 기막힌 설계도를 차근차근 보여줄 테니.
자, 환자분들, 진정하시고. 한 줄로 서서 빨간 줄 밟지 말고 따라오시길.
대한민국 사회 속 부품(우리)들에게 노동과 고난의 신성화(神聖化)는 유교적 뿌리 보다 더 유구한 전통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격언들이야 말로 이 사회를 지탱하는 종교적 경전이지 않았던가. 그 교리는 섬뜩할 만큼 명료하다.
개인을 갈아 넣는 것은 숭고한 제의(祭儀)요,
그 과정에 의문을 품는 자는 나약한 이단이로다.
그리하여 우리는 착취 구조에 저항하기보다, 그 안에서 소처럼 버티는 능력을 숭고한 미덕으로 내면화하며 성장했다. 외부의 압력을 내면의 채찍으로 바꿔 스스로를 후려치는 기이한 자기 착취 메커니즘을 이 땅에서 ‘1인분 하는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 프로토콜*로써 익힌 것이다. (*프로토콜 Protocol: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해 정해진 규칙, 절차, 약속)
예로부터 가진 거라곤 사람밖에 없어 인적 자원을 연료 삼아 달려온 이 사회는, 이제 상향 평준화된 노오력의 무한궤도에 올랐다.
더 말라야 하고,
더 예쁘고 잘생겨야 하며,
더 똑똑하고,
친구도 더 많아야 하고,
인스타를 위시한 SNS에 올릴 갓벽한 사진도 더 많이 찍어야 하고,
그러려면 당연히 돈도 더 많아야 한다.
아, 기왕이면 죽을 때까지(그게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먹고살 수 있는 노후자금까지 마련되면 더 좋고.
마치 ‘한 판만 더!’를 외치는 노름꾼처럼, 사회는 우리에게 ‘더! 더! 더!’를 연호한다. 멈추는 법을 알려주는 어른은 없다. “이만하면 됐다(You are enough).”는 말 한마디에는 다들 어찌 그리 인색한지. 대신, 외모 지상주의, 부자 선망, 가난 혐오를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메시지만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현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 사회라는 유기체는 어떤 묘안을 짜냈을까? 그게 바로 자기 학대 시스템에 '갓생'이라는 힙스터 딱지를 붙여주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몸과 정신을 연료 삼아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과 궤를 달리하는 이들에게 '게으른 낙오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길 수 있으니까. 그러니 쉬는 게 불안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죄책감이 들지. 안 그러고 배겨?
이 기이한 현상을 본 한 철학자(한병철)는 갓생이라는 말 대신 ‘피로사회’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현대사회가 “~해서는 안 돼”라고 금지하던 과거의 ‘규율사회’를 지나,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Yes, you can!)”라고 속삭이는 ‘성과사회’로 넘어왔다고 분석한다. 이 긍정의 구호는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교묘하고 잔인한 착취의 주문이다. ‘안 되는 것’에는 명확한 끝이 있지만,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피로사회의 특징은 가해자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울을 보면 살점이 묻은 채찍을 든 자기 자신만 서 있을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완벽한 일치다. 만약 도전에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당신에게만 지워진다.
“네 노력이 부족해서.”
"더 열심히 했어야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잘 했어야지/ 뛰어났어야지."
대단하지 않은가? 한 개인의 실패 앞에 그 누구도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 감히 그런 불평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사회에서 제대로 1인분도 못하는 '도태남/녀', '폐급' 취급을 받을 뿐이다.다. 이것이야말로 가성비 죽이는 현대판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 노예로 부려먹는데, 노예들이 도망칠 생각은 안 하고 서로 욕하기 바빠요! 자기 탓하기 바빠요!
혹시 이 글을 읽는 지금도 ‘시간 아깝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하는 조바심이 드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축하한다. 당신은 이 사회가 길러낸 가장 모범적인 마조히스트다. 그래서 잘 못 된 거냐고? 아니지. 지극히 정상이지. 왜? 본디 인간은 환경보다 거대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겠는가. '생존하기 위해 따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압력'에 가까운 것을.
또 모르지. 앙리 라보리의 말처럼 '모든 변화는 인간이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인식했을 때' 일어난다고 하니, 우리 모두가 사유하고 반항하는 노예가 된다면 이 빌어먹을 도박판 위에서 내려오게 될 날이 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