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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해지는데 실패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by Ellie




나는 특별하다고 믿었다.

지금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미래의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했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학습.


아마 나에게 자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부터 각종 매체와, 그 메시지를 내면화한 친지와 가족들이 여린 귓바퀴에 나직이 속삭였을 것이다.


"넌 특별해. 지금 아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특별해져야 해. 그래야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어. 누릴 수 있어."


순진했던 나는 그런 일방적인 메시지를 한 치의 의심 없이 넙죽넙죽 주워 삼키며 자라났을 것이다.


나는 자연스레 내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에 연연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엔 어른들의 비위에 맞게 행동하면, 그들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면 쉽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방긋방긋 웃기, 뛰다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울지 않기, 그림 잘 그리기, 뭐든 주는 대로 잘 먹기, "너는 어린애가 어쩜 말을 그렇게 예쁘게 잘하니" 소리가 나오도록 철든 척하기- 이런 것들.


특별하다는 건 주변의 관심을 받는 거였다. 하지만 존재 자체로는 그 조건을 충족하기엔 부족했다.

Being이 아니라 Doing에 뒤따라오는 것이 특별함.


난 무언가를 해야 하는구나.

유쾌함과 즐거움 따위의 감흥을 세상에 제공해야 해.

아니면 적어도 유익할 수 있는 무언가.

자기 효능감은 외부의 인정으로부터 얻어지는 거야.


어린아이의 학습은 무서울 정도로 단순했다.


학창 시절에 접어들자 '특별함'의 기준은 더욱 복잡해졌다. 더 이상 방긋 웃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관심을 받기 위해선 점점 더 많은 숫자가 필요했다. 성적표에 찍힌 등급, 등수, 몸무게 따위 같은 것들.


나는 내가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노래 취향, 스타일, 어울리는 친구들, 인터넷 속 다양한 커뮤니티들 활동들. 평범한 하루하루는 지루한 대기 상태에 불과했다. 특별해질 나를, 특별해질 순간을 기다리는 유예 상태.

대학을 가면, 어른이 되면, 지금 보다 하루하루가 더 재밌고 멋있어질 거야. 엄청나게 멋진 이벤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해. 왜? 내 인생은 끝내주게 특별할 테니까.


"(...) 스토너는 대학을 커다란 저수지처럼 생각하고 있을걸.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을 완성해 줄 물건들을 고를 수 있는 곳, (...) 진실,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모퉁이 너머 바로 다음 복도에 있다는 것이지. 아직 읽지 못한 바로 다음 책,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한 바로 다음 서가에.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그 서가에 이를 것이고, 그러면.... 그러면...."


세상이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속삭이며 환상을 팔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나는 어물쩍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모퉁이 너머 바로 다음 복도'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특별한 내가 되고자, 어떻게든 성공이란 것을 해보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그 어떤 특별한 사건에도 부딪치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것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특별하다 믿었던 자신이 평범은커녕 아예 무능력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고 설레었던 인연들에 견딜 수 없는 지루함과 따분함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며, 처음 듣는 순간 황홀했던 음악도 영화도 글귀도 다 닳아 반질반질 해져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내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던 모든 것들에게서 무의미를 느끼고 권태를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절망감까지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호기롭게 도전한 일에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인정 받으리라 생각했던 일에선 외면 받았다.


계속 이어지기만 하는 끝도 없는 복도.

문득,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저 짝사랑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라던 익명의 누군가의 글귀가 떠올랐다.


더 절망적인 건, 그 짝사랑의 간질간질함 마저 퇴색해 버리고 만다는 것.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불모지처럼 감정과 희망이 메말라 버리는다는 것.

이 세상에서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

내가 특별하다 여겼던 것들도 결국 다 변하고 만다는 것.


나는 실패했다.

특별해지는 일에.

무언가를 특별히 여기는 일에.


그리고 나는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스토너>에 등장하는 스토너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그 소설이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책 뒤표지에 있던 소개글 때문이었다.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


책을 펼친 나는 단 페이지 만에 소설의 끝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소설이 너무나도 ‘특별하지 않은’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서문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이렇게 소개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강사가 되었지만 평생 조교수 이상 오르지 못했고, 그의 강의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학생도 없었으며, 동료들에게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 채 죽은 남자, 스토너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라고.


이토록 특별할 것 없는 인물의 이야기가 어떻게 400페이지에 달하는 한 권의 서사가 되었을까.

어떻게 전 세계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게 되었을까.


문득 내가 웹소설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배웠던 내용이 떠올랐다. 작품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사랑하고 매료될 수 있는 독보적인 매력을 가진 캐릭터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스토너는 그 잘 팔리는 스토리의 법칙을 위반한 캐릭터였다. 그저 평범하고, 소심하며, '키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남자에 불과했다.


소설 속 동료 교수 매스터스는 그에게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린다.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서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 자네는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미소 짓는 얼굴로 비꼬듯 악의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내뱉은 말. 매스터스의 독설은 거울 같았다. 그곳에 비친 것은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평생을 특별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온, 잔뜩 지친 표정의 내 얼굴. 평범한 현재를 ‘가짜’라 여기고, 오지 않은 ‘진짜 인생’만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유예시켰던 오만함.


아아. 나를 실패자로 만든 것은 내가 반드시 특별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집념이었구나.


애당초 나라는 존재가 특별해질 수 있긴 했을까?

처음부터 가당치도 않은 허무맹랑한 꿈을 꾼 건 아니었을까?


이 광대한 우주. 수십억 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한 인간의 생애란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할 텐데. 은하 한쪽 귀퉁이, 별을 맴도는 푸르스름한 먼지 한 톨 위에서 잠시 머무는 존재일 뿐이라는데. 심지어 이 은하조차 수천 개의 은하가 모인 은하군의 일부일 뿐이며, 그 은하군이 또 수천 개 모여 초은하단을 이루고 그 초은하단마저 우리가 아는 수천 개 중 하나일 뿐이라는데.


2천억 개의 은하,

1조 개의 별,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행성들.


광활한 우주적 시간 앞에서 100년 남짓한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눈을 감고 하나를 세어보라. 영원이라는 것도 그와 같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특별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특별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Being이 되지 못한 채 Doing의 언저리에서 정처 없이 헤매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ing,

지금 이 순간에 어떤 특별함을,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느냐,

오직 이것 뿐 아닐까?


이쯤.

나는 다시 중간에 내뱉었던 질문으로 돌아온다.


특별할 것 없는 스토너란 인물의 이야기가 어떻게 400페이지에 달하는 한 권의 서사가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작가가 스토너란 가상 인물의 일생을 애정 어린 시각을 가지고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거대한 무의미 속에서 아주 별 거 아닌 것에 애정을 품는 순간, 그것이 특별해지는 연금술이 일어났으므로.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특별해지는 데 실패했어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 아무도 아닌 나일지이라도.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누군가 내게 그리 말하더라도,

끝까지 나만의 '스토너‘를 써 내려갈 수 있겠느냐고.














-. 참고 서적: 존 윌리엄스, <스토너>

-. 참고 영상: https://youtu.be/oBIo2AyjNMo?si=WMZUb3MtMUAUYA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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