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왜 더 외로운가
이상한 일이다.
분명 내 사회적 스킬은 과거에 비해 월등히 업그레이드되었다. 열일곱의 내 사회성을 1.0 버전이라 한다면, 지금의 나는 최소한 3.0은 될 터. 그때보다 쓰는 표현이나 어휘도 훨씬 더 부드러워진 데다, 경청의 기술도 늘었으며, 비속어도 쓰지 않는다. 뿐인가? 팬싸에서 영혼 없이 '아 진짜요?' 무한 반복하는 아이돌보다 훨씬 리액션도 풍부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무해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내 주변은 한 없이 적막해졌다. 이제와 진짜 친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고 세어보니, 두 손은커녕 한 손으로 꼽고도 손가락이 남는다.
쓰라린 현실.
인간관계에도 등가 교환 법칙이 있는 걸까?
사회성을 얻는 대신 재미와 매력을 잃어버린다던가.
별 용무 없이 전화를 걸어 시시덕 거릴 친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밤. 문득 십 대 후반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매일이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했으며, 할 말이 너무 많아 쉬는 시간이 한 없이 짧기만하던 그때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기만 하던 그때 그 시절.
내 주변은 어쩜 그렇게 복닥거렸을까?
열일곱,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쓰모'의 정회원이었다.
쓰레기 모임, 줄여서 쓰모.
지금 와서 보면 어딘지 모르게 패배주의적이고 자조적인 네이밍처럼 들리지만, 그때 우리에겐 그저 재미로 붙인 이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별 다른 의미가 없었다는 소리.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자연스러운 의문.
왜 열일곱 소녀들로 꾸려진 모임 이름이 저따위란 말인가.
사실, 이름이 먼저였는지, 활동이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의 흑역사를 발굴하고, 뻘짓과 실패담을 곱씹고 킥킥대며 서로를 쓰모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름처럼 서로의 찌질함에 환호했고, 실패담을 달게 나눠 마시며 웃고 떠들고 즐겼다.
양말 뒤축이 닳아 빵꾸 난 일, 살쪄서 치마 옆단이 뜯어진 거, 돈 아끼려고 셀프로 앞머리 자르다가 삑사리 난 모습, 눈썹 다듬다가 망해서 민둥산이 된 거, 개망한 시험 점수, 부모님, 담임, 학원 선생님들한테 지독하게 깨진 썰 등등. 요새의 팬덤 문화처럼 하나 건덕지라도 생길라치면 1차, 2차, 3차... 뇌절할 때까지 되새김질하는 게 포인트였다.
누군가 특별히 더 망한 날엔 다 같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외쳤다.
"장하다! 오늘도 쓰모의 에이스다운 업적을 세웠다. 다른 팀원들도 분발해서 어서어서 실적을 올리도록."
운영은 나름 체계적이었다. 대여섯 명의 정회원과 수시로 들락날락 거리는 객원 멤버들. 마치 SNL의 고정 출연진과 호스트 같은 구조랄까. 누가 레전드급 병크를 터뜨리면 바로 스카우트. 실패 썰은 밈이 되고, 콘텐츠가 되었다.
물론 여느 십 대처럼 투닥댈 때도 있었지만, 쓰모는 나름 건강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안에선 창피함이나 수치심, 쪽팔림과 같은 종류의 감정은 지속력이 짧았다. 쓰모의 제단에 올려진 순간 몇 분 만에 개그 소재로 탈바꿈되었으니까. 스트레스받던 일도, 완전 거지 같던 상황도, 같이 까고 웃다 보면 별것 아닌 게 됐다.
물론,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같이 들면 덜 무거웠을 뿐.
특이했던 점이라면, 여기서만큼은 남들보다 못나고 부족한 점이 더 환영받았다는 거?
망하면 망할수록 쓰모 안에서 급이 더 올라가고 대우가 좋아졌다.
왜?
놀릴 거리가 많아지니까.
소위 말하는 떡밥을 더 잘 뿌릴 수록 MVP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이의 불행을 우리의 행복(?)으로 삼으며 낄낄대던, 살짝 별 난 십대 후반 소녀들의 모임.
어쩌면 쓰모는 서로의 망가질 권리를 보장해 주는, '안전지대'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나를 쓰레기 같다며 자조하는 순간 역설적인 자유로움을 느꼈다. 세상의 잣대로부터, 평범과 평균 그리고 정상이라는 잣대로부터, 기성세대의 시선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여기서만큼은 실패해도, 망해도, 찌질해도 괜찮았다. 다른 곳에서는 늘 뭔가를 증명해야 했지만 쓰모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인정받을 필요가 없었다. 어딘가 불완전하고 불안한 모습 그대로, 어색하고 서툰 모습 그대로 환영받는 곳. 우리들의 안전한 실패 공간.
하찮으면 하찮을수록 더 끈끈해지는 이상한 연대.
망해도 괜찮은 곳.
아니, 망해야만 진정한 멤버가 되는 곳.
그게 쓰모였다.
그리고 우리들 주변은 언제나 킬킬 대는 웃음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다음 (2) 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