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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Feb 13. 2022

삼재 온 환자의 발렌타인 꽃다발

그리고 주차장 기둥에 문 한짝을 해먹었다

지난 동지에 엄마가 내년에 삼재라며 팥죽을 걸쭉하게 끓여 들이키라고 했다.

에이 뭐 그런게 어딨어 하고 웃어 넘겼는데

새해를 시작하기가 무섭게 많은 일들이 생겼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처음 느껴보는 두통과 함께 턱이 움직이지 않았고

치과에선 스트레스라며 근이완제와 진통소염제 정도를 처방받았으나

1달은 넘게 턱을 움직이가 힘들었고

턱을 움직이기 힘드니 먹는게 힘들어졌고

언제부턴가 먹는 것 자체가 무서워져서 식이장애가 왔다.

잘 먹질 않으니 늘 기운이 없었고

살기 위해 억지로 영양제를 먹으면 밤새 속이 쓰렸다.

온 몸에 알 수 없는 피부염증이 올라와서 피가 났다.

어느 날은 잘 다니던 계단에서 갑자기 휘청해서 몇 번을 굴러서 넘어졌다.

괜찮다 싶었는데 다음날 무릎이 빠졌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원래도 마른 체형이었으나 살이고 근육이고 많이 빠져서 

대부분의 옷이 주먹이 두개는 들어갈 정도로 커져버렸다.

너무 먹고 싶은 샌드위치를 앞에 두고 입을 벌릴 수가 없어서

가위를 들고 다녔다.

그렇게 음식을 잘게 잘라도 속에서 받지 않아서

갑자기 속상해서 화장실에서 펑펑 울기도 했고

가끔은 걷다가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저앉거나

심박수가 40부터 200까지 왔다갔다 거리는 엄청난 변동성에 숨이 잘 안쉬어졌다.


모든 정신의 8할은 몸이 아픈데에 쏠려있었다.

1할은 이렇게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무기력한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남은 1할은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한 옅은 고민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약인지라

호르몬은 내 몸을 어떻게든 정상화 시키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든 먹으라고 식욕을 당겨댔고 이제 턱은 가만히 있기만하면 통증은 없었다.


디저트를 중심으로 조금씩 혀를 쓰지 않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하루 음식을 먹으면 하루는 단식을 하고 있지만

몸도 기근상태에 적응을 좀 하는지 정상인의 텐션을 유지시켜줬다.


회사 평가 시즌이 다가올 수록

지난 4년간 별로 느끼지 않은 이직에 대한 다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함께 일하던 동기들의 이직과 퇴사 소식을 들으며 

남의 회사의 JD를 기웃거리면서 이렇게 잡캐는 어딜 가야 할 지

어떤 스킬셋을 채워야 할 지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디긴 했지만, R기어를 두고 후진하던 삶의 비탈길이 조금 완만해지고

중립기어를 놓고 다시 드라이브를 걸 채비를 했다.


그리고 뭐처럼 날이 따뜻해서 요즘 유행한다는 연보라색 코트를 입고 외출한 

발렌타인의 날.

오랜만에 운전을 다짐하고 나왔는데

어처구니 없이 차 옆구리를 주차장 기둥에 박았다.

노란 주차장 페인트를 컴파운드로 열심히 지워봤지만

손톱에 걸리는 벗겨진 도장을 따라 찌그러진 차문을 통해

덴트론 해결 못할 어쩔 수 없는 판금 사이즈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컴파운드로 문대놓고 왁싱해놔서 저보다는 멀쩡하다...ㅎ


더디지만 회복하고 있는 내 삶이었는데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들에 속이 상했다.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 지도 갈피가 잘 잡히지 않았다.



일이 잘 안풀릴 때는 새로움을 추진하기도 겁이 날 때가 있다.

눈을 뜨고 걷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무너져있을 때도 채찍을 걸었던 타입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가장 엄격했고, 나와 친밀한 자들에게도 어쩌면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댔을 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앞으로 가지 못하는 맘에 안드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엄마는 어떻게든 내가 먹을 수 있을 만한 음식을 찾아 매일 도시락을 싸주고

괜히 서글픈 맘에 어리광처럼 올린 인스타 스토리에 안나 언니는 프로틴을 보내줬고

짝꿍은 내가 돈아깝다고 싫어한다던, 사실은 아재같은 나를 참 소녀처럼 만드는 꽃다발을 내민다.


"삼촌, 나 삼재인가봐요"

"왜?"

"저 또 사고냈어요...ㅎ 쪽팔려요"

"사람 쳤어?"

"아뇨. 주차장에서 혼자 박았어요..."

"다른거 안박았으면 삼재 아니야"


오늘 아침 어제의 사고가 악몽이 되어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삼재"라는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리고 광고로 뜨는 페이지에서 2022년 토정비결에 내 생년월일과 시를 쳤다.

올해는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발렌타인이라 더 비싸게 사왔다는 더 예쁜 꽃다발을 다듬어 꽃병에 담고

채광 좋은 거실에 두었다.

아재같은 나라 의외같긴하지만 나는 꽃다발을 꽤 잘 만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쪽으로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배워보는 것 어떠냐고 물었다.

포장지는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였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받는 사람에게 맞는 글을 같이 새겨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꽃을 받으면 잘 말려서 새로운 꽃다발을 만든다. 꽃을 만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화 다발이 비싸서 조화 꽃다발을 사서 

동네 아줌마들끼리 돌려서 초등학교 졸업식 때 사진을 찍었다는 엄마도

어제보다 꽃이 생생하다며 

23개월 당신의 손자에게 꽃을 보여주고 싶다 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었지만

덕분에 하찮은 소재로 글 쓸 힘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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