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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Sep 17. 2019

벌새; 은희라는 이별

영화 '벌새' 리뷰



 벌새를 보게 된 건 우연이다. 주전장을 보려 방문한 독립영화관에서 바로 뒷 시간에 벌새가 있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여운에 젖어 은희 생각에 내 마음이 무너져내리고야 말았다. 은희가 다리를 보던 그 새벽과도 같은 빗속에서 은희는 어디로 갔을지, 어떻게 자라났을지 알고픈 저녁이었다.


 벌새의 장점을 꼽자면 여성 감독, 여성 주연, 여성 서사라는 점. 그리고 여성의 이야기임에도 로맨스 중심이 아닌 한 사람의 성장과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성을 그려낸다는 점이다. 또한 영화에 두 번 정도 등장하는 로맨스는 이성애만이 아닌 동성애와 미성숙한 연애를 함께 다룬다. 이성애와 성인 중심이던 기존의 영화계에서 배제되었던 아동과 동성애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고 진보적이라는 느낌을 와닿게 한다.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데 벌써부터 영화 곳곳에 스며든 여운과 아릿한 감성. 영화계를 이끌 새로운 거장이 탄생한 걸 목격한 기분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영화는 1994년을 배경으로 하여 은희라는 아주 보편적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은희가 겪게 되는 사건과 행동들은 1994년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유효한, 한국 여성이 가진 기억 모음집처럼 보인다. 친구와의 다툼, 학업 스트레스, 외톨이, 연애, 도둑질, 학창시절의 동성연애, 가정폭력 등 은희가 겪는 사건들은 동일한 경험이 있는 관객을 자극한다.

 이 과정에서 은희는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겪는다. 새로운 만남을 하고 머지않아 이별한다. 가족들 또한 말썽이다. 오빠는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엄마와 아빠는 바람과 부부 싸움을 해대며 언니는 술과 야간 외출로 가족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 은희는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모든 주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적 단절과 화해를 연달아 겪는다.

 이런 은희의 삶에 영지가 나타나며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명문대를 휴학한 영지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물음을 던지며 은희의 생각을 뒤흔들고, 그 말처럼 은희는 남자친구와의 이별과 친구와의 갈등을 겪는다. 곧이어 영지마저 자취를 감추고 은희의 감정선은 폭발하듯 흘러간다.


 이 흐름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기점으로 다시 차분해진다. 그 사건을 마주하기 전 은희에게 다가오던 문제와 폭력들은 느리지만 순식간에 해소된다. 가부장적이던 아버지는 수술을 기점으로 딸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을 나타내고 폭력적이던 오빠는 자신의 불안함을 해소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아이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고, 비뚤어진 행위를 하던 언니는 동생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은희는 마지막으로 남은 '영지와의 이별'을 해소하고자 다가가지만 미완으로 남는다. 그 장면에서 은희는 당황하지 않고 영지의 흔적을 읽어내며 천천히 이별을 인정한다. 그렇게 재난을 마주한 은희는 모든 이별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의 성장을 마치려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모더니즘적인 구조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갈등과 해소 다시 갈등의 구조를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은희가 가진 두려움을 끌어올리고 종국에는 은희의 구원자이자 선지자인 영지를 죽음으로써 소멸시켜 마지막 남은 희망을 지워버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달리, 은희는 담담히 이별을 이해한다. 누군가의 도움으로는 온전히 성장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자신에게 남는 건 나 홀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스스로 성장을 완성시키게끔 유도한다. 은희에게 닥친 이별은 결국 홀로서는 은희를 위한 일련의 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은희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스며들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구조를 짜 맞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줄게.


                       

 영화 막바지에 등장하는 영지의 독백(편지)은 영화의 전체적인 시나리오와 맞닿아있다. 나는 이것이 먼 미래의 은희가 과거의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은희가 그 편지를 읽고 이별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이미 이해하고 있던 사실을 편지로써 확인한 것인지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지만, 좀 더 환상적 요소로 본다면 은희의 감정선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된다.


 벌새는 1초에 수십 번에 달하는 날갯짓을 한다. 그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꿀을 찾아 헤매고 위험 속에서 성장해간다. 제목인 벌새처럼 은희는 이별과 혼동 속에서 끊임없이 날갯짓을 반복한다. 가부장과 폭력 속에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꿀을 찾아 날아간다. 엔딩 장면에서 보여준 은희의 담담함은 꿀을 찾아 향한 날갯짓이 결국엔 아픔을 이겨냈다는 의미가 아닐까.



#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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