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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Aug 13. 2019

김복동; 흔적은 영원하다

영화 '김복동' 리뷰


 자크 데리다는 자신의 스승인 소쉬르가 주장한 기표와 기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차연(Differance)과 흔적(Trace)을 제시한다. 기의가 고정되지 않으면 의미 또한 확정되지 않고 차이만 있을 뿐, 그 차이들의 자취(Trace)가 언어, 즉 텍스트에 존재함을 주장한다.

 피해자의 삶은 흔적과 같다. 상황에 따라, 역사에 따라, 관점에 따라, 입장에 따라 그들이 입은 피해는 의미가 바뀐다. 그럼에도 그들이 피해 입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흔적이 된다.

 마찬가지로 김복동 선생님은 전쟁의 흔적이다. 누군가는 그를 위안부 피해자라 부르고, 누군가는 거짓이라 부르며, 다른 누군가는 인권운동가라고 부른다. 주장하는 기의가 무엇이건, 선생님의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흔적으로 자리 잡는다.


 김복동 선생님은 1992년 3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히며 전 세계에 이 사실을 고발한다. 이전까지 전쟁의 이면이나 소문 따위로 여겨지던 위안부가 사실이었으며, 자신이 증거임을 알렸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가에서 그동안 상처를 숨겨오던 피해자들이 등장해 고발에 동참한다.

 최근에는 위안부를 한국 최초의 미투 운동이라는 관점으로 본다. 미투 운동이 권위에 의한 성범죄를 고발하며 피해들이 서로 연대한다면, 위안부는 전쟁과 식민주의 성범죄를 고발하며 전 세계의 피해자들이 연대하며 진실을 알리는 쓰디쓴 역사의 미투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세세히 드러난다. 피해자임에도 상처를 감추며 살아야 했고, 평생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했다. 주변 친지들에게 진실을 알리지만 돌아오는 건 '부끄럽다'라는 말과 외면뿐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선 엄마의 무덤에서 서러움과 울분을 토해내는 것으로 표현하고, 영화 '김복동'에선 자신의 가족에게 외면받았던 김복동 선생님의 외로운 시간을 보여준다. 

 현대의 미투 운동 또한 같은 과정을 겪는다.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를 지탄하며 부끄러운 자들이라 비난한다. 피해자의 용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진실이 가려진다. 그럼에도 선생님을 비롯한 피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연대한다.


 갸야트리 스피박은 식민지 여성을 조명하며, 이들이 두 가지 이상의 억압에 시달리는 하위주체(Subaltern) 상태에 처해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피해자와 미투 운동은 식민과 전쟁, 그리고 가부장 사회라는 억압 속에서 목소리와 주체를 빼앗긴다. 그럼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증거가 유효함을 보여준다. 약 50년간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침묵과 하위주체를 강요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주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 캔 스피크'라는 제목처럼 피해자들은 언어를 가질 수 있고, 하위주체가 아닌 주체를 지닐 수 있다. 영화 '김복동'은 여성이자 인권운동가이며, 동시에 피해 받은 과거가 있던 인간의 탈 하위주체 과정이다. 스피박의 저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김복동 선생님은 '아이 캔 스피크'라 대답하는 것이다.


 일본에 이런 말이 있다. '거짓말도 백 번 하면 진실이 된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말일 수도 있다.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장하고, 지속적으로 법적 처벌을 미루는 것으로 거짓말을 진실인 양 바꿀 수 있다. 위안부 문제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와 강남역 사건이라는 큰 아픔을 겪었고,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고 더는 외면할 수 없음을 알기에, 미약하나마 변화를 거쳐갈 것이다.

 이는 향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다 할지라도 끝나지 않는다. 군부정권과 민주화운동 시기 성범죄, 성 착취 피해자가 존재하며 '몽키 하우스'로 불리는 기지촌 피해자가 남아있다.

 데리다의 주장처럼 위안부와 정권 피해자, 기지촌 피해자는 각자 그 기표와 기의가 다르지만 성범죄 피해자라는 같은 흔적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김복동이라는 흔적은 영원할 것이다.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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